[경제노트] (20세기를 이끈 경제학자들) (8) 새뮤얼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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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미국에서 태어난 새뮤얼슨(Paul A. Samuelson)는 오는 5월15일에
84회 생일을 맞는다.
그는 16세에 시카고대학에 입학하고 20세가 되기 전에 하버드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어 26세이던 1941년에 하바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MIT의 강사가
되고 6년후에 정교수로 승진하였다.
그후 MIT에 머물면서 경제학과를 개설하고 발전시켰다.
새뮤얼슨은 케인스(Jonh M. Kynes)처럼 경제학에 혁신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그의 공헌은 경제이론의 정비와 확장에 있다.
이러한 그에게 수학은 유용한 수단이었다.
1941년에 완성되어 1947년에 출판된 "경제분석의 기초"는 경제학자들로
하여금 모든 경제행위를 최적화 문제의 해결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또 동태적 분석이 결여된 정태적 분석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게 했다.
그는 이 책에서 미적분과 미분방정식 등 수학적 기법과 표현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힉스(Jonh Hicks)가 1939년의 "가치와 자본"에서
대부분 수학적 표현을 부록으로 돌려놓은 것과 대비된다.
이 두 책은 모두 현대 경제학의 내용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수학적 표현과 관련해서는 새뮤얼슨의 선택이 새로운 전통으로
받아들여졌다.
새뮤얼슨은 "경제분석의 기초"를 완성하기에 앞서 24세의 대학원생이었던
1939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승수효과와 가속효과를 결합한 동태적 거시경제
모형을 제안하였다.
그가 1938년에 발표한 논문은 효용함수나 무차별곡선으로부터 도출되었던
수요곡선을 현시된 선호에서 도출하는 이론, 즉 현시선호이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는 그 후에도 국제무역, 공공재, 경제성장 등 다양한 부문에서 이론의
정비와 확장에 기여했다.
1947년의 존 베이츠 클라크상과 1970년의 노벨경제학상이 그에게 주어진
것도 이러한 공헌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존 베이츠 클라크상은 40세 이하의 경제학자에게 주어지는 상인데, 그는
제1회 수상자다.
그리고 그에게 수여된 노벨경제학상은 두 번째의 것이다.
첫 번째 노벨경제학상은 계량경제학의 선구자인 틴버겐(Jan Tinbergen)과
프리쉬(Ranar A. K. Frisch)에게 수여되었으며, 힉스는 네번째 수상자이다.
새뮤얼슨이 대학원생이었던 1936년은 케인스의 "일반이론"이 출판된 해다.
새뮤얼슨은 케인스경제학을 미국과 세계에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그의 초급 교과서 "경제학"은 중요한 매개체였다.
1948년에 출판된 이 교과서는 케인스의 거시경제학과 마샬의 미시경제학을
결합하고 있는데, 새뮤엘슨은 여기서 "신고전파 종합"을 이루었다고
주장했다.
이제는 모든 경제학도에게 익숙한 단순 케인스모형의 그림, 즉 45도 직선과
그것을 가로지르는 총수요곡선으로 이루어진 그림도 이 교과서에서 처음
사용됐다.
이 교과서의 인쇄에는 최신의 기술이 활용됐으며 그림에는 최초로 색채가
사용됐다.
이미 명성을 가졌던 새뮤얼슨은 이 교과서로 재산도 함께 갖게 됐다.
이 교과서는 다른 어떤 교과서보다 많이 판매됐으며 세계 각국에서
번역됐다.
그리고 3-4년마다 개정돼 1980년에 11판이 발행됐다.
각 개정판은 그 사이에 일어난 경제학의 변화를 재빨리 반영했다.
필립스(A. W. Phillips)가 주장한 임금 혹은 물가와 실업의 역관계도
1961년도 개정판에서 소개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한편 1985년과 1989년에는 각각 12판과 13판이 MIT 출신인 노드하우스
(William, D. Nordhaus)와의 공저로 출판됐다.
김진방 < 인하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jkim@inha.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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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에서 수학이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음을 감지할 수 있으면서 분석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 1935년의 경제학은 기회의 땅이었다.
그 곳에는 아름다운 정리가 널려져 있어서 주워서 정연하게 정돈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 새뮤얼슨의 ''황금시대의 경제학 : 개인적 회고'' 중에서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3월 15일자 ).
84회 생일을 맞는다.
그는 16세에 시카고대학에 입학하고 20세가 되기 전에 하버드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어 26세이던 1941년에 하바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MIT의 강사가
되고 6년후에 정교수로 승진하였다.
그후 MIT에 머물면서 경제학과를 개설하고 발전시켰다.
새뮤얼슨은 케인스(Jonh M. Kynes)처럼 경제학에 혁신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그의 공헌은 경제이론의 정비와 확장에 있다.
이러한 그에게 수학은 유용한 수단이었다.
1941년에 완성되어 1947년에 출판된 "경제분석의 기초"는 경제학자들로
하여금 모든 경제행위를 최적화 문제의 해결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또 동태적 분석이 결여된 정태적 분석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게 했다.
그는 이 책에서 미적분과 미분방정식 등 수학적 기법과 표현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힉스(Jonh Hicks)가 1939년의 "가치와 자본"에서
대부분 수학적 표현을 부록으로 돌려놓은 것과 대비된다.
이 두 책은 모두 현대 경제학의 내용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수학적 표현과 관련해서는 새뮤얼슨의 선택이 새로운 전통으로
받아들여졌다.
새뮤얼슨은 "경제분석의 기초"를 완성하기에 앞서 24세의 대학원생이었던
1939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승수효과와 가속효과를 결합한 동태적 거시경제
모형을 제안하였다.
그가 1938년에 발표한 논문은 효용함수나 무차별곡선으로부터 도출되었던
수요곡선을 현시된 선호에서 도출하는 이론, 즉 현시선호이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는 그 후에도 국제무역, 공공재, 경제성장 등 다양한 부문에서 이론의
정비와 확장에 기여했다.
1947년의 존 베이츠 클라크상과 1970년의 노벨경제학상이 그에게 주어진
것도 이러한 공헌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존 베이츠 클라크상은 40세 이하의 경제학자에게 주어지는 상인데, 그는
제1회 수상자다.
그리고 그에게 수여된 노벨경제학상은 두 번째의 것이다.
첫 번째 노벨경제학상은 계량경제학의 선구자인 틴버겐(Jan Tinbergen)과
프리쉬(Ranar A. K. Frisch)에게 수여되었으며, 힉스는 네번째 수상자이다.
새뮤얼슨이 대학원생이었던 1936년은 케인스의 "일반이론"이 출판된 해다.
새뮤얼슨은 케인스경제학을 미국과 세계에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그의 초급 교과서 "경제학"은 중요한 매개체였다.
1948년에 출판된 이 교과서는 케인스의 거시경제학과 마샬의 미시경제학을
결합하고 있는데, 새뮤엘슨은 여기서 "신고전파 종합"을 이루었다고
주장했다.
이제는 모든 경제학도에게 익숙한 단순 케인스모형의 그림, 즉 45도 직선과
그것을 가로지르는 총수요곡선으로 이루어진 그림도 이 교과서에서 처음
사용됐다.
이 교과서의 인쇄에는 최신의 기술이 활용됐으며 그림에는 최초로 색채가
사용됐다.
이미 명성을 가졌던 새뮤얼슨은 이 교과서로 재산도 함께 갖게 됐다.
이 교과서는 다른 어떤 교과서보다 많이 판매됐으며 세계 각국에서
번역됐다.
그리고 3-4년마다 개정돼 1980년에 11판이 발행됐다.
각 개정판은 그 사이에 일어난 경제학의 변화를 재빨리 반영했다.
필립스(A. W. Phillips)가 주장한 임금 혹은 물가와 실업의 역관계도
1961년도 개정판에서 소개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한편 1985년과 1989년에는 각각 12판과 13판이 MIT 출신인 노드하우스
(William, D. Nordhaus)와의 공저로 출판됐다.
김진방 < 인하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jkim@inha.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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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에서 수학이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음을 감지할 수 있으면서 분석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 1935년의 경제학은 기회의 땅이었다.
그 곳에는 아름다운 정리가 널려져 있어서 주워서 정연하게 정돈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 새뮤얼슨의 ''황금시대의 경제학 : 개인적 회고'' 중에서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3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