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조정관 시절 ]

내각 기획통제관실의 기획조정관으로 오라는 권유를 받고는 별로 망설이지
않았다.

당시 나의 직책인 최고회의 전문위원이 임시직 같은 성격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행정부에서 실제 기획업무를 하고 싶다는 뜻이 더 강했다.

2년 이상 5개년경제계획에 매달리다 보니 "이렇게 하면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느낌 같은 것을 이미 갖고 있었다.

거기다 "계획"이라는 구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실천에 옮기
려는, 특히 일을 꾸미려는 의욕이 굴뚝같이 일어났다.

나는 당시까지 5.16 군사정부가 도입한 "기획운영제도"에 대해 상세히 파악
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의 인연이란 모를 일이다.

알고보니 이 기획운영제도는 미국 유학시절 은사였던 로이드 쇼트 교수와
관련된 것이었다.

한국의 기획운영제도는 미국을 본 뜬 것이었고 미국의 기획제도는 바로
쇼트 교수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 작품이었다.

행정학 교수였던 쇼트박사는 미 육군 기획제도 창설연구위원으로 활약했고
60년대초엔 미국 원조로 세워진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고문단장으로 한국에
와 우리나라 행정학 발전에 크게 공헌한 사람이다.

기획조정관으로 가기로 결심한 이후 나는 56년 미네소타대학 유학당시 수강
노트를 펼쳐놓고 쇼트 교수의 강의내용을 다시 반추해보면서 기획운영제도의
큰 틀과 방향을 짐작할 수 있었다.

미국은 40년대말 2차 대전 중 크게 팽창한 정부기구의 구조조정을 위해
후버 위원회를 설치해 혁신적인 축소.합리화 작업을 벌였다.

49년 8월 이 위원회 권고에 의해 육.해.공군의 3개성을 국방성으로 통합
했다.

이에 앞서 46년 8월에는 국방연구원(National War College), 47년 2월에는
연합참모대학(Armed Forces Staff College) 등과 같은 국가기획관 양성기관을
창설했다.

53년 7월에는 "기획 및 계획 교범"이 발간됐다.

6.25를 전후해 한국군 고급 장교들은 미국 군사학교에서 이런 기획제도와
관련된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5.16쿠데타 후 이 제도 도입을 선도한 것은 당시 송요찬 내각수반이었다.

그는 이미 60년 4.19 직전에 참모총장으로 있으면서 이 제도를 한국육군에
들여왔었다.

이 경험을 살려 송 내각수반은 유명무실한 정무차관 대신 기획통제관제
도입을 지시했다.

그는 이와 별도로 국방연구원에 기획제도 운영에 관한 특별 교육과정을
신설하고 고급공무원을 연수시켰다.

61년 8월25일 "내각기획통제관실 설치에 대한 법"이 공표되고 직제가
확정됐다.

이 직제에 의하면 "내각기획통제관은 내각수반의 기획통제에 관한 사무를
보좌하기 위해 행정 각원 부, 처의 정책과 기획의 심사분석 평가 및 조정에
관한 사항을 관장토록 한다"고 돼있다.

그 밑에 "기획조정관" "심사분석관" "계획조정관"(이상 2급)을 두고 행정
재정 서기관 사무관 등 32명의 핵심 실무진을 배치했다.

능력만 있고 마음만 먹으면 큰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업무영역이 어마어마
하게 넓었다.

특히 내가 맡은 기획조정관은 "내각의 전반적인 정책 및 기획 수립에 관한
사항을 관장"토록 법에 명시돼있었다.

심사분석관은 당시 육군본부에 있던 고참 대령을 발탁했고 계획조정관은
우선 공석으로 두었다.

61년 11월 하순 나는 기획조정관으로 취임했다.

새 정부 1년차라 할 일이 엄청나게 많았다.

급하게 만들어야야할 새로운 계획도 적지 않았다.

군에서 도입한 기획제도였지만 마치 내 자신이 입안하고 오랫동안 집행해온
제도인양 전혀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군에서 파견된 현역 장교들과도 의사소통이 아주 잘됐다.

지금 생각해도 기이할 정도이다.

5개년 "계획"에 매달리다 "기획"업무를 맡게 됐지만 계획이나 기획이나
원리원칙은 대동소이했다.

자신감을 갖고 일할 수 있었다.

50년대말 미국과 영국 유학을 통해 대통령제와 내각제를 비교 연구해보면서
많은 문헌을 뒤졌던 것도 큰 힘이 됐다.

그래서 기획조정관으로 취임하자 마자 고급 공무원들에게 "국가기획운영"에
관한 지식과 실무기법을 전파시키기 위해 "기획"이라는 학술지에 가까운
계간물을 필자 책임하에 발행키로 했다.

62년 1월 발행된 창간호는 지금도 가까이 두고 가끔 펼쳐보는 책이다.

취임한지 보름도 안된 12월초 "국정 운용과 예산편성에 대한 내각수반의
제안 설명"을 2주일 내에 기초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쿠데타 정부라 그런지 매사가 대단히 급했다.

당시 한국은행에서 파견된 과장급 직원들과 3일밤을 꼬박 새다시피 해
초안을 작성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과거의 "시정연설" "예산제도설명"은 물론 미국 대통령의 연두교서까지
입수해 참고했다.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우선 문체와 스타일을 어떻게 하느냐를 갖고 많은
시간을 보냈다.

처음 기초하는 일이라 국정에 관한 내외정세 파악부터 시정방침 중점사업
가용자원 등 실로 많은 분량을 조사하고 파악해야 했다.

더군다나 내각수반이 발표하는 것이라 숫자 하나 토씨 한글자도 많은 신경을
써야 했다.

행정관으로서 책임에 대한 중압감과 긴장감을 새삼 느꼈다.

정말 고된 훈련, 그것도 실전을 통한 훈련 과정이었다.

이를 통해 국가운영전반을 비교적 단시일내에 파악할 수 있었다.

이 경험이 전경련 사무국을 맡게 됐을 때 큰 도움이 됐음은 물론이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1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