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은 "20세기의 사회과학"이다.

지난 백년을 통해 "경세제민"의 학문, "치세의 방법론"으로 입지를 확실하게
다졌다.

사회과학으로선 유일하게 노벨상 수상대상인데서도 그 입지와 위상은
확고하게 드러난다.

케인즈와 슘페터에 대해 얘기하지 않고 20세기 역사를 얘기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비록 세기말 대변혁기를 맞아 경제학은 절대절명의 위기에 놓여있지만 새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서도 현대 경제학자들의 업적을 돌이켜봐야 할 것이다.

"20세기를 빛낸 경제학자들"을 전공분야별로 정통한 국내 유명학자들의
릴레이 집필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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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경제사상가 중에서 가장 크게 사회적으로 영향을 준 인물은 아마
영국의 케인스(J M Keynes)일 것이다.

그렇지만 슘페터(Joseph A Schumpeter)만큼 경제학계에서 평가가 뚜렷이
향상된 인물도 없을 것이다.

1984년 미국경제학회지에 실린 논문에서 기어쉬 (Giersch) 교수는 20세기의
세 번째 4반세기를 "케인즈의 시대"라고 부른다면, 네 번째 4반세기를
"슘페터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1970년대 중반이후 수요관리 측면에서 정부 역할을 강조한 케인스의
정책처방이 잘 듣지 않게 된 반면, 공급측면에서 기업가 역할을 강조한
슘페터의 견해가 적절하게 됨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슘페터는 케인스와 같은 해인 1883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서 직물제조
업자인 부친 밑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4세 때 죽자 10세 때 어머니는 그라즈로 이사가서 퇴역 장군과
재혼했다.

이로 인해 슘페터는 최상급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됐다.

1901년 그는 빈대학에 들어가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에게서 배웠다.

이어 체르노비츠, 그라즈대학에서 가르쳤다.

그는 1919년에는 잠시 오스트리아 재무상을 지냈다.

이어 1920년에는 민간은행장을 거쳤다.

1924년부터 그는 독일 본 대학의 교수로 있다 히틀러가 등장하자 1932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됐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경제이론을 가르치며 계량경제학회장과 미국경제학
회장 등을 역임했다.

슘페터는 경제변동론, 경제발전론, 경제체제론, 경제학설사 등 광범한 분야
에서 연구업적을 남겼다.

그렇지만 살아서 케인스의 업적이 널리 받아들여짐에 따라 슘페터의 업적은
기대만큼 각광받지 못하고 있었다.

슘페터의 경제사상은 세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매년 똑같은 경제행위가 반복되는 정태적 측면이다.

이러한 순환적 흐름(circular flow)에서 슘페터는 통상적인 수요.공급에
관한 일반균형이론이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태적 상태에서는 경제발전이 일어나지 않고 이윤도 발생
하지 않는다.

따라서 둘째, 동태적 측면에서 순환적 흐름을 깨고 창의적 기업가에 의한
기술혁신(innovation)에 의해 창조적 파괴가 발생한다.

기술혁신이란 단지 생산방법의 혁신 뿐만 아니라 신상품개발, 새로운 원료
획득, 새로운 판로개척, 그리고 새로운 경영조직 출현을 포함한다.

이러한 기술혁신에 의해 기업이윤이 발생하고 경제는 발전하게 되므로,
그는 기술혁신이 자본주의 발전의 근본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기술혁신에 의해 기업이윤이 발생하고 경제가 발전하게 된다.

그는 기술혁신이 자본주의 발전의 근본 동력이라고 주장했다.

셋째 그의 업적은 경제영역을 넘어서 정치, 사회부문에 걸쳐있다.

그는 대규모 기업조직 속에서 기업가의 창의성이 사라지고 자본주의에
비판적인 문화가 득세하면 자본주의는 서서히 사회주의로 대체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슘페터의 사회주의 출현에 관한 예측은 다행스럽게 틀렸지만, 그가 강조한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의 중요성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홍기현 <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hongk@plaza.snu.ac.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1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