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85조원 규모의 내년도 예산안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소비와 투자심리의 위축으로 극심한 내수침체를 겪고 있는데다 해외수요마저
불확실한 현 상황에서 경기부양을 위한 정부 재정의 역할에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번 예산이 GDP의 5%에 달하는 재정적자를 수용하고 있는 것도 총수요
진작이라는 정책목표와 무관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적자재정과 관련하여 가장 쟁점이 되는 문제는 첫째, 이것이
과연 단기적으로 총수요조절에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여부와 둘째, 적자의
누적으로 인해 장기적으로 재정의 건전성이 해쳐질 가능성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오랫동안 균형예산의 관행을 유지하다 갑자기 큰 규모의
적자예산으로 돌아섰다는 점, 현재 진행중인 금융 기업 노동시장의 구조조정
에 따르는 경제적 비용의 상당부분을 앞으로 정부재정이 떠안아야 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 현재의 경기침체에서 벗어날지가 불확실하다는 점
등이 적자예산을 평가하는 주요한 고려사항이 되어야 한다.(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없어 재정의 경기부양효과나 건전성 문제를 교과서적
단순논리로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
우선 적자재정의 총수요 효과를 살펴보자.
현재의 적자예산은 상당부분 경기침체로 인한 세수부족, 금융구조조정이나
실업대책 관련 지출 등 경제위기와 직결된 요인들에 의해 기인된 것이다.
경제위기와 결부된 이러한 성격의 재정적자는 케인지안류의 확대재정정책
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첫째 적자재정의 원인으로서 세수가 줄어든 부분을 보면, 소비나 투자를
유인하기 위해 세율을 삭감한 적극적인 경우라기 보다는 경기침체에 따르는
소득, 이윤 및 지출의 감소로 과세베이스가 축소된 소극적인 경우이기 때문에
교과서적 경기부양정책과는 거리가 멀다.
둘째 정부지출이 증가한 경우도 그 내용을 보면 재화나 서비스의 구매가
아니라 금융구조조정지원, 고용보험지급 등 이전지출적 성격을 띄는 항목이
주류를 이루므로 총수요진작효과가 그다지 크지 않을 수 있다.
재정적자의 총수요효과와 관련하여 또 하나 우려되는 점은 금융구조조정에
따르는 재정부담이다.
현재 정부 계획에 의하면 64조원에 달하는 재정자금이 이 용도로 투입될
예정이며 이 자금의 대부분은 공채를 발행해 조달된다.
재정자금은 금융기관이 보유한 부실자산을 매입하거나, 금융기관의 부채인
예금을 대신 지급해 주거나, 손실로 인해 감식된 금융기관의 자본 확충을
지원하는 일에 사용된다.
성업공사가 발행하는 약 32조원 규모의 부실채권매입용 공채는 금융기관이
자산으로 보유하는 한 당장 자본시장에 미치는 효과가 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현금을 동원할 필요가 있는 나머지 부분은 공채를
시중에 내다 팔거나 중앙은행에 인수시킬 수밖에 없다.
전자의 경우, 우리나라의 채권시장 규모가 크지 않음을 감안할 때 구축효과
를 통한 민간투자수요 위축현상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후자의 경우는 곧 통화증발을 의미하므로 인플레이션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한다.
금융구조조정의 재정부담이나 급격히 증가한 실업대책비용 등은 재정의
장기적 건전성에 대한 우려로 이어진다.
현재 예산에 기록되고 있는 금융구조조정 비용은 발행된 공채에 대한
이자부담분만을 상정한 것으로, 추후 원금상환에 따르는 잠재적 재정비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또한 경기가 회복세로 반전된다 하더라도 구조조정의 여파와 노동시장의
구조변화로 인해 실업자수가 쉽게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같은 규모의 재정적자라도 경기적 성격을 띄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지속성을 가지는 구조적 성격의 적자라면 정부부채증가에 따르는 이자부담의
증가와 국가신뢰도의 감소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오랫동안 균형예산을 유지해온 덕분에 현재의 정부부채-GDP의 비율이
타국에 비해 낮은 상태에 있으므로 부채누적에 따르는 예산상의 이자부담
증가는 크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비교적 단기에 지속적 성장궤도에 재진입할 수 있다면 몇년간의
재정적자나 어느정도의 정부부채증가를 크게 우려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경기회복이 지연돼 세수입이 부진하고 대규모의 실업지출이 지속
되는 경우, 지속적인 적자재정과 이에 따른 통화증발로 인해 1980년대
남미국가들이 경험한 유형의 경제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금융위기를 대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재정적자는 그 잠재적
규모나 경제적 효과, 또 적자의 지속성이라는 측면에서 통상적인 재정적자
와는 구별해야 한다.
같은 규모의 적자라도 이전지출이나 이자지출과 같은 피동적인 예산항목이
아니라, 재화나 서비스의 구매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동적인
항목들이 주류를 이루어야 경기부양효과가 클 것이다.
과거 피동적이고 비신축적인 균형재정을 곧 재정의 건전성이라고 과대평가한
정책관행에도 문제가 있지만, 부채잔고가 크지 않으므로 어느 정도의
재정적자는 해도 된다는 식의 안이한 정책대응 또한 경계해야 한다.
현 정부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정책과제 중의 하나는 재정이 단기적으로
적극적인 정책기능을 수행하면서도 장기적인 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는
묘안을 찾는 일이다.
전주성 < 이화여대 교수/경제학 jjun@mm.ewha.ac.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