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유명무실한 정부위원회들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기로 한 것은 잘한
일이다. 정부부처별로 수많은 위원회들이 난립해 있지만 대부분 별로 하는
일없이 간판만 있는 데다 형식적인 의견수렴절차를 밟는데 시간과 예산을
낭비해 오히려 행정효율만 떨어뜨리는 부작용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위원회들을 없앤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위원회는 언제고 다시 만들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해왔다. 이번 위원회
정비에 대해서도 정권초기에 있게 마련인 연례행사일 뿐이라는 냉소적인
시각이 없지 않다. 과거에도 개혁한다며 수많은 위원회들을 정비했다가
행정부처가 여론수렴을 제대로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한다는
비판이 일자 또다시 위원회들을 만들었지만 달라진 것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3백72개나 되는 정부위원회의 38.9%인 1백45개 위원회들을 내년
상반기까지 폐지하거나 통합하고 앞으로는 위원회의 존폐여부를 2년마다
재검토하며 신설하는 경우에는 일몰제를 도입해 난립을 예방한다고 한다.
하지만 위원회를 양산하는 당사자인 정부부처들을 그대로 두고 위원회만
정비하는 것은 뿌리는 놔둔채 곁가지만 치는 격이다. 이번 정비대상에서
보류된 30개 행정위원회는 중앙부처 경영진단때, 22개 기금관련위원회는
기금정비때 각각 정비하기로 한 까닭도 이때문이다.

정부부처들이 즐겨 위원회들을 만드는 까닭은 한마디로 행정편의주의 탓이
크다. 즉 관련전문가나 여론선도층으로 구성된 위원회에 자문을 구함으로써
문제가 생겼을 경우에는 여론을 수렴했다고 핑계를 대기 위해서다. 이처럼
위원회 구성이 구색갖추기에 불과하다 보니 대부분의 위원회들이 일년에
한두번 회합을 가질 뿐이며 의견수렴도 불과 하루이틀전에 통고한뒤 서면
동의를 구하는 등 지극히 형식적이다.

더나아가 위원회의 존재가 정부부처의 독단적인 결정을 합리화하는 수단
으로 이용되는 경우마저 적지 않다. 비록 반대의견이 적지 않아도 정부방침이
바뀌거나 재고된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이 그간의 사정이다. 따라서 위원회는
정부방침에 들러리만 서준 셈이 된다.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 입법기능이
취약하고 행정기관인 정부부처가 대부분의 법률을 만드는 우리현실에서
이같은 부작용은 더욱 심각한 실정이다.

따라서 정부위원회 숫자를 줄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여론수렴을 보다
객관적이고 투명하게 하는 것이다. 미국처럼 국회의 소관 상임위원회에서
이해당사자의 주장과 관련전문가들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듣고 관련정보를
충분히 검토한뒤 입법활동에 반영하는 것이 바람직한 여론수렴 과정이다.

그러자면 연중무휴로 상임위 활동이 계속돼야 하며 행정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돼야 한다. 행정부 독주는 정보독점에서 비롯되며 위원회 양산은 이를
합리화하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