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크루그먼 MIT교수 기고문 '신뢰게임'] 'IMF 처방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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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P.Krugman) MIT대 교수가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의 아시아
위기 대응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주간 "뉴 리퍼블릭"(10월5일자)지에 실린 기고문 "신뢰게임(The
Confidence Game)"을 통해 아시아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워싱턴의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그는 미국과 IMF의 아시아 처방이 정통 경제이론을 내팽개친 채 투기자들과
벌이는 신뢰게임에 지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또 지금의 정책기조는 아시아 경제를 회생시키기는 커녕 막다른 길로 더욱
몰아붙이는 결과만 낳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IMF 처방이 어떻게 잘못됐는지를 밝힌 그의 기고문 내용을 요약 소개한다.
< 도쿄=홍찬선 기자 hcs@tamacc.chuo-u.ac.jp >
-----------------------------------------------------------------------
국제통화기금(IMF)과 미국 재무부 당국자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조차
그들이 아시아에서 옳은 일을 했으며 그들의 처방이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그들은 집착할만한 몇가지 일을 했다.
한국과 태국에서 금리는 떨어지고 인도네시아를 제외하면 경제성장률
감소폭도 95년의 멕시코보다 나쁘지 않다.
그러나 워싱턴의 권력장벽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희망적이지 않다.
그들은 금융교란의 실제 결과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위기는 지금까지 면역성을 유지해온 라틴아메리카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경기침체의 경제적.인간적 비용은 불을 보듯 뻔하다.
경기침체는 서방국가에도 피해를 입힌다.
그렇지만 이런 위기에 대한 미국의 경제정책 담당자 책임에 관해선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조만간 명백하게 밝혀질 것이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경제학에 대한 불신이 확산되는 것이다.
미국에서 가장 훌륭하고 똑똑한 경제학자들이 워싱턴에서 경제정책을
좌우하고 있다.
그들은 정통 경제분석을 아시아에 적용하고 있다.
그 결과 파국이 닥쳤다.
이제 경제학자의 처방을 무시하고 비즈니스맨이나 저널리스트, 최소한
경제정책을 만들 정도의 지적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의존하자는 분위기가
강해지고 있다.
이건 절반쯤은 맞는 말이다.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일류 경제학자가 경제정책의 고위층을 차지하고
있다.(특히 서머스 차관과 그의 팀은 유례를 찾기 힘든 올스타 그룹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통 경제분석을 적용하지 않고 있다.
반대로 아시아 위기의 초기단계부터 워싱턴의 반응은 교과서를 내던지는
것이었다.
정통경제학을 적용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경제학자가 아니라 은행원
이었다.
왜 그런가.
처음부터 워싱턴을 사로잡은 것은 경제적 펀더멘탈이 아니라 시장의 신뢰
(market confidence)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중요했다.
그들이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정책보다는 정책결정자가 믿는 정책이
투자자들의 편견에 호소할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선입견이었다.
아시아 위기의 근본원인에 대한 견해가 무엇이든지 간에 근접한 원인, 즉
기적을 붕괴(debacle)시킨 충격은 명확하다.
국경없는 자본시장이 그것이다.
위기 직전까지도 아시아 경제는 돈을 투자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문제가 없었다.
96년 한 해만에도 외국은행들은 현재 위기에 빠져 있는 국가들에게
1천억달러 이상을 빌려 줬다.
비은행투자가들도 1백억달러 이상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97년 하반기에는 그런 은행들이 5백억달러 이상의 대출금을 중도에
회수했다.
국제경제학 교과서는 투자가들이 이처럼 갑자기 신뢰를 잃은 이유가 무엇
이라고 설명할까.
별로 시원한 대답은 없을 것이다.
있다면 경기침체를 피하기 위해 통화가치를 떨어뜨리고(평가절하) 금리를
대폭적으로 인하하라는 주문일 것이다.
그것은 미국이 지난 85년 시장에서 레이건 행정부 초기의 무역적자 상태를
지속할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생겼을 때 채택했던 것과 똑같다.
당시 달러화는 달러당 2백40엔에서 1백40엔으로 폭락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금리를 인하해 보조를 맞췄으며 미국경제는
확장국면을 지속했다.
그러나 아시아 위기가 발생했을 때 워싱턴의 반응은 매우 달랐다.
실제로 위기에 빠진 나라들은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그들의 환율을
지키라는 말을 듣지 못했으며 태국 바트, 한국 원, 인도네시아 루피아는
달러에 대해 폭락하도록 허용됐다.
그러나 이들 국가는 금리를 인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올리도록 강요
받았다.
몇몇 외국 투자가들이 돈을 유출하지 않도록 설득함으로써 환율폭등(통화
가치하락)을 막기 위해서라는 미명하에 말이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30년대 이후 가장 극심한 경기침체를 강요받은 셈이다.
실제로 이들 국가들은 경기침체를 막거나 완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에
거시경제 정책을 아예 잊도록 강요받았다.
그렇다면 경기회복은 어디서 온다고 생각되는가.
부실은행을 폐쇄하고 정실(cronies)을 제거하는 개혁이 신뢰를 회복시켜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들 국가는 제대로 하면 국제자본이 결국은 다시 물밀듯이 몰려올
것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워싱턴의 반응은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이 2세대전부터 공식적
으로 맺어온 일종의 거래(deal)를 끊어버린 것이었다.
심지어 그것은 배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거래는 "케인즈팩(Keynesian compact)"이라고 불릴 수 있다.
이는 자유시장은 실패했으며 고도로 규제된 경제, 혹은 중앙계획시스템이
파멸적인 경기침체를 피할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주장되던 30년대에
싹을 틔운 것이다.
자유시장에 대한 신뢰가 회복된 것은 대공황에서 회복된 때가 아니라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금리인하나 재정적자 확대 등 거시경제 개입이
자유시장경제를 완전고용 상태에서 안정시키는데 필요하다는 확신이 선 때다.
경기침체 때마다 FRB는 경제에 활력을 주기 위해 금리를 인하했다.
그러나 "신흥시장"경제에 대해선 이런 거래가 갑자기 사라진다.
현재 브라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살펴 보라.
브라질은 보다 자유로운 시장을 향해 중요한 경제개혁을 추진하고 있으나
실업률은 계속 올라가고 있다.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실질환율을 유지하기 위해 금리를 올리고 재정을
긴축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브라질은 경기후퇴에 대해 맞서 싸우는 것보다 파멸적인 경기침체를 확실
하게 하도록 교육받고 있는 것이다.
이는 태국과 한국도 똑같다.
물론 태국은 미국이 아니다.
태국의 수입은 소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과다한 평가절하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또 아시아의 많은 기업과 은행은 거대한 달러표시 부채를 갖고 있어 급격한
평가절하는 부채상환부담을 가중시켜 채무불이행에 빠지게 할 우려도 있다.
그러나 워싱턴의 경제정책 담당자들이 개발도상국에 대해 미국과 다른
처방을 강요하는 데는 보다 깊은 이유가 있다.
바로 투기자들의 불안(fear of speculators)이다.
최근 몇년동안 아시아에서 이뤄진 투자는 매우 바보스러운 것이며 부패에
찌든 "정실"시스템의 산물이라고 결론짓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아시아에서처럼 투자자의 신뢰를 잃었을 경우 미국 금융
시스템은 얼마나 안전할 것인가.
미국의 금융시스템을 안정시키기 위해 해마다 유입되는 약 2천억달러가
이듬해 2천억달러가 아니라 2조달러 유출된다고 생각하면 태국에서 일어난
위기가 미국에도 닥칠 수 있다.
얼마 정도의 대출이 갑자기 "무수익(nonperforming)" 자산으로 되면 합리적
이라고 할 수 있을까.
건전한 은행들은 얼마나 도산할 것인가.
한마디로 아시아 경제의 죄가 무엇이든지 간에 현재 그들에게 잘못돼 있는
것은 그들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것을 이해하는게 중요하다.
미국처럼 부유하고 거대한 국가는 시장신뢰를 쉽게 잃지 않는다고 믿는게
일반적이다.
또 금융시장은 유효한 정책에 의해 유지된다는 가정 아래 운영된다.
그러나 경제성장의 경험이 적은 소국은 항상 위험에 싸여 있으며 그러한
신뢰붕괴를 피하는 것이 경제정책의 중심과제가 된다.
중요한 것은 투기적 공격이 자기실현적(self-justifying)이기 때문에
펀더멘탈 측면에서 유효한 정책이 시장신뢰를 확보하는데 충분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제 워싱턴의 훌륭한 경제학자들의 관점에서 상황을 살펴보자.
그들은 투자자들의 신뢰가 깨지기 쉬운 경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발견
한다.
미국이나 IMF에 도움을 요청하는 국가는 정의상으로 그들 통화에 대한
파괴적인 매도요청(run)에 빠져 있을 정도로 위험하다.
따라서 정책의 목적은 시장심리를 안정시키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위기는 자기실현적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경제정책은 시장신뢰를
얻기에 충분하지 않다.
시장의 변덕과 편견과 수용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국제경제정책은 경제학과 아무런 관계도 없이 시행되게 돼있다.
그것은 아마추어 심리실습이 돼 버린다.
IMF와 미국 재무부는 그 실험속에서 그들이 각국에 제시한 정책이 시장에서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도록 빌고 있을 뿐이다.
불행히도 교과서에서 논의되는 이슈는 사라진게 아니다.
투자자가 공황상태에 빠진 나라는 금리를 올리고 재정지출을 줄이며 파괴적
인 위기를 막기 위해 통화가치를 유지해야 한다는 워싱턴의 주장이 옳다고
가정해 보자.
그래도 금융긴축과 재정긴축 및 통화의 고평가는 경기후퇴를 유발한다는
것은 진실로 남는다.
워싱턴은 어떤 처방을 제시할 것인가.
아무것도 없다.
신뢰게임을 하느라고 경제정책의 통상적인 관심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정말로 미친 짓(pretty crazy)이다.
지난 4년동안 멕시코 아르헨티나 태국 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홍콩
등 7개국은 30년대 미국보다 심각한 경기후퇴를 겪고 있다.
이는 신뢰게임을 하는 동안 거시경제정책이 경기침체를 회복하기보다는
악화시키는 쪽으로 쓰여져 왔기 때문이다.
더 나은 방법은 없는가.
각 국가들이 핫머니의 광범위한 유출입을 허용하는 한 대안은 없다.
자본흐름이 자유로운 한 국가는 자기실현적 투기공격에 약할 수밖에 없다.
물론 자본의 국제이동을 제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워싱턴에서 이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수많은 기술적 어려움이 지적됐다.
95년에 IMF와 미국 재무부는 멕시코와 아르헨티나를 대신해서 신뢰게임을
벌여 승리했다.
그러나 이번 아시아에선 승리하지 못하는 것같다.
만약 수년후에 아시아가 회복하고 라틴아메리카가 재앙을 피할 경우
케인즈팩은 부서진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런 시스템은 살아남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자유화가 경제정책을 신뢰게임의 룰에 종속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면
세계는 조만간 그런 게임을 할 필요가 없다고 결정할 것이다.
[ 폴 크루그먼 교수 약력 ]
<> 74년 미국 예일대 졸업
<> 77년 MIT경제학 박사
<> 80년 예일대 조교수
<> 82년 미국대통령 경제자문위원
<> 84년 MIT교수
<> 91년 존 베이트 클라크상 수상
<> 95년 스탠퍼드대 교수
<> 현재 MIT교수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8일자 ).
위기 대응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주간 "뉴 리퍼블릭"(10월5일자)지에 실린 기고문 "신뢰게임(The
Confidence Game)"을 통해 아시아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워싱턴의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그는 미국과 IMF의 아시아 처방이 정통 경제이론을 내팽개친 채 투기자들과
벌이는 신뢰게임에 지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또 지금의 정책기조는 아시아 경제를 회생시키기는 커녕 막다른 길로 더욱
몰아붙이는 결과만 낳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IMF 처방이 어떻게 잘못됐는지를 밝힌 그의 기고문 내용을 요약 소개한다.
< 도쿄=홍찬선 기자 hcs@tamacc.chuo-u.ac.j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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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화기금(IMF)과 미국 재무부 당국자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조차
그들이 아시아에서 옳은 일을 했으며 그들의 처방이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그들은 집착할만한 몇가지 일을 했다.
한국과 태국에서 금리는 떨어지고 인도네시아를 제외하면 경제성장률
감소폭도 95년의 멕시코보다 나쁘지 않다.
그러나 워싱턴의 권력장벽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희망적이지 않다.
그들은 금융교란의 실제 결과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위기는 지금까지 면역성을 유지해온 라틴아메리카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경기침체의 경제적.인간적 비용은 불을 보듯 뻔하다.
경기침체는 서방국가에도 피해를 입힌다.
그렇지만 이런 위기에 대한 미국의 경제정책 담당자 책임에 관해선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조만간 명백하게 밝혀질 것이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경제학에 대한 불신이 확산되는 것이다.
미국에서 가장 훌륭하고 똑똑한 경제학자들이 워싱턴에서 경제정책을
좌우하고 있다.
그들은 정통 경제분석을 아시아에 적용하고 있다.
그 결과 파국이 닥쳤다.
이제 경제학자의 처방을 무시하고 비즈니스맨이나 저널리스트, 최소한
경제정책을 만들 정도의 지적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의존하자는 분위기가
강해지고 있다.
이건 절반쯤은 맞는 말이다.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일류 경제학자가 경제정책의 고위층을 차지하고
있다.(특히 서머스 차관과 그의 팀은 유례를 찾기 힘든 올스타 그룹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통 경제분석을 적용하지 않고 있다.
반대로 아시아 위기의 초기단계부터 워싱턴의 반응은 교과서를 내던지는
것이었다.
정통경제학을 적용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경제학자가 아니라 은행원
이었다.
왜 그런가.
처음부터 워싱턴을 사로잡은 것은 경제적 펀더멘탈이 아니라 시장의 신뢰
(market confidence)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중요했다.
그들이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정책보다는 정책결정자가 믿는 정책이
투자자들의 편견에 호소할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선입견이었다.
아시아 위기의 근본원인에 대한 견해가 무엇이든지 간에 근접한 원인, 즉
기적을 붕괴(debacle)시킨 충격은 명확하다.
국경없는 자본시장이 그것이다.
위기 직전까지도 아시아 경제는 돈을 투자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문제가 없었다.
96년 한 해만에도 외국은행들은 현재 위기에 빠져 있는 국가들에게
1천억달러 이상을 빌려 줬다.
비은행투자가들도 1백억달러 이상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97년 하반기에는 그런 은행들이 5백억달러 이상의 대출금을 중도에
회수했다.
국제경제학 교과서는 투자가들이 이처럼 갑자기 신뢰를 잃은 이유가 무엇
이라고 설명할까.
별로 시원한 대답은 없을 것이다.
있다면 경기침체를 피하기 위해 통화가치를 떨어뜨리고(평가절하) 금리를
대폭적으로 인하하라는 주문일 것이다.
그것은 미국이 지난 85년 시장에서 레이건 행정부 초기의 무역적자 상태를
지속할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생겼을 때 채택했던 것과 똑같다.
당시 달러화는 달러당 2백40엔에서 1백40엔으로 폭락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금리를 인하해 보조를 맞췄으며 미국경제는
확장국면을 지속했다.
그러나 아시아 위기가 발생했을 때 워싱턴의 반응은 매우 달랐다.
실제로 위기에 빠진 나라들은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그들의 환율을
지키라는 말을 듣지 못했으며 태국 바트, 한국 원, 인도네시아 루피아는
달러에 대해 폭락하도록 허용됐다.
그러나 이들 국가는 금리를 인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올리도록 강요
받았다.
몇몇 외국 투자가들이 돈을 유출하지 않도록 설득함으로써 환율폭등(통화
가치하락)을 막기 위해서라는 미명하에 말이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30년대 이후 가장 극심한 경기침체를 강요받은 셈이다.
실제로 이들 국가들은 경기침체를 막거나 완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에
거시경제 정책을 아예 잊도록 강요받았다.
그렇다면 경기회복은 어디서 온다고 생각되는가.
부실은행을 폐쇄하고 정실(cronies)을 제거하는 개혁이 신뢰를 회복시켜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들 국가는 제대로 하면 국제자본이 결국은 다시 물밀듯이 몰려올
것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워싱턴의 반응은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이 2세대전부터 공식적
으로 맺어온 일종의 거래(deal)를 끊어버린 것이었다.
심지어 그것은 배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거래는 "케인즈팩(Keynesian compact)"이라고 불릴 수 있다.
이는 자유시장은 실패했으며 고도로 규제된 경제, 혹은 중앙계획시스템이
파멸적인 경기침체를 피할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주장되던 30년대에
싹을 틔운 것이다.
자유시장에 대한 신뢰가 회복된 것은 대공황에서 회복된 때가 아니라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금리인하나 재정적자 확대 등 거시경제 개입이
자유시장경제를 완전고용 상태에서 안정시키는데 필요하다는 확신이 선 때다.
경기침체 때마다 FRB는 경제에 활력을 주기 위해 금리를 인하했다.
그러나 "신흥시장"경제에 대해선 이런 거래가 갑자기 사라진다.
현재 브라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살펴 보라.
브라질은 보다 자유로운 시장을 향해 중요한 경제개혁을 추진하고 있으나
실업률은 계속 올라가고 있다.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실질환율을 유지하기 위해 금리를 올리고 재정을
긴축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브라질은 경기후퇴에 대해 맞서 싸우는 것보다 파멸적인 경기침체를 확실
하게 하도록 교육받고 있는 것이다.
이는 태국과 한국도 똑같다.
물론 태국은 미국이 아니다.
태국의 수입은 소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과다한 평가절하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또 아시아의 많은 기업과 은행은 거대한 달러표시 부채를 갖고 있어 급격한
평가절하는 부채상환부담을 가중시켜 채무불이행에 빠지게 할 우려도 있다.
그러나 워싱턴의 경제정책 담당자들이 개발도상국에 대해 미국과 다른
처방을 강요하는 데는 보다 깊은 이유가 있다.
바로 투기자들의 불안(fear of speculators)이다.
최근 몇년동안 아시아에서 이뤄진 투자는 매우 바보스러운 것이며 부패에
찌든 "정실"시스템의 산물이라고 결론짓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아시아에서처럼 투자자의 신뢰를 잃었을 경우 미국 금융
시스템은 얼마나 안전할 것인가.
미국의 금융시스템을 안정시키기 위해 해마다 유입되는 약 2천억달러가
이듬해 2천억달러가 아니라 2조달러 유출된다고 생각하면 태국에서 일어난
위기가 미국에도 닥칠 수 있다.
얼마 정도의 대출이 갑자기 "무수익(nonperforming)" 자산으로 되면 합리적
이라고 할 수 있을까.
건전한 은행들은 얼마나 도산할 것인가.
한마디로 아시아 경제의 죄가 무엇이든지 간에 현재 그들에게 잘못돼 있는
것은 그들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것을 이해하는게 중요하다.
미국처럼 부유하고 거대한 국가는 시장신뢰를 쉽게 잃지 않는다고 믿는게
일반적이다.
또 금융시장은 유효한 정책에 의해 유지된다는 가정 아래 운영된다.
그러나 경제성장의 경험이 적은 소국은 항상 위험에 싸여 있으며 그러한
신뢰붕괴를 피하는 것이 경제정책의 중심과제가 된다.
중요한 것은 투기적 공격이 자기실현적(self-justifying)이기 때문에
펀더멘탈 측면에서 유효한 정책이 시장신뢰를 확보하는데 충분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제 워싱턴의 훌륭한 경제학자들의 관점에서 상황을 살펴보자.
그들은 투자자들의 신뢰가 깨지기 쉬운 경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발견
한다.
미국이나 IMF에 도움을 요청하는 국가는 정의상으로 그들 통화에 대한
파괴적인 매도요청(run)에 빠져 있을 정도로 위험하다.
따라서 정책의 목적은 시장심리를 안정시키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위기는 자기실현적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경제정책은 시장신뢰를
얻기에 충분하지 않다.
시장의 변덕과 편견과 수용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국제경제정책은 경제학과 아무런 관계도 없이 시행되게 돼있다.
그것은 아마추어 심리실습이 돼 버린다.
IMF와 미국 재무부는 그 실험속에서 그들이 각국에 제시한 정책이 시장에서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도록 빌고 있을 뿐이다.
불행히도 교과서에서 논의되는 이슈는 사라진게 아니다.
투자자가 공황상태에 빠진 나라는 금리를 올리고 재정지출을 줄이며 파괴적
인 위기를 막기 위해 통화가치를 유지해야 한다는 워싱턴의 주장이 옳다고
가정해 보자.
그래도 금융긴축과 재정긴축 및 통화의 고평가는 경기후퇴를 유발한다는
것은 진실로 남는다.
워싱턴은 어떤 처방을 제시할 것인가.
아무것도 없다.
신뢰게임을 하느라고 경제정책의 통상적인 관심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정말로 미친 짓(pretty crazy)이다.
지난 4년동안 멕시코 아르헨티나 태국 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홍콩
등 7개국은 30년대 미국보다 심각한 경기후퇴를 겪고 있다.
이는 신뢰게임을 하는 동안 거시경제정책이 경기침체를 회복하기보다는
악화시키는 쪽으로 쓰여져 왔기 때문이다.
더 나은 방법은 없는가.
각 국가들이 핫머니의 광범위한 유출입을 허용하는 한 대안은 없다.
자본흐름이 자유로운 한 국가는 자기실현적 투기공격에 약할 수밖에 없다.
물론 자본의 국제이동을 제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워싱턴에서 이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수많은 기술적 어려움이 지적됐다.
95년에 IMF와 미국 재무부는 멕시코와 아르헨티나를 대신해서 신뢰게임을
벌여 승리했다.
그러나 이번 아시아에선 승리하지 못하는 것같다.
만약 수년후에 아시아가 회복하고 라틴아메리카가 재앙을 피할 경우
케인즈팩은 부서진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런 시스템은 살아남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자유화가 경제정책을 신뢰게임의 룰에 종속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면
세계는 조만간 그런 게임을 할 필요가 없다고 결정할 것이다.
[ 폴 크루그먼 교수 약력 ]
<> 74년 미국 예일대 졸업
<> 77년 MIT경제학 박사
<> 80년 예일대 조교수
<> 82년 미국대통령 경제자문위원
<> 84년 MIT교수
<> 91년 존 베이트 클라크상 수상
<> 95년 스탠퍼드대 교수
<> 현재 MIT교수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