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일산에서 서울로 오는 자유로 곳곳에는 "노견 없음"이란 표지판이
있다.

"노견"은 "포장도로의 양쪽 가장자리 부분"을 뜻한다.

국도를 지나다 보면 길섶이나 갓길이라고 써놓은 곳도 있지만 노견이
여전히 많다.

같은 이유에서 조식 석식 음용수가 아침밥 저녁밥 먹는물보다 유식한 말로
여겨진다.

청소년들 사이에선 야자(야간자율학습)와 범생(모범생) 따(따돌림) 등이
일상어로 자리잡았다.

신세대가수들은 "싸랑하는 싸람끄와 므안나미연 오앤즈이 모르게 씨올레는
가씀..." 식으로 발음한다.

소설가 이윤기씨는 이들이 우리말의 "리을"대신 영어의 L, 우리말의 "지읒"
대신 영어의 Z를 지향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때문에 기성세대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래를 청소년들은 잘도
알아듣는다.

이대로 가다간 어른들은 아이들과의 의사소통에 있어 모두 사오정이 될
판이다.

외국어투성이던 상표가 IMF체제 아래 우리말로 바뀌는 건 그나마 다행
스럽다.

우리말 전화(784-3000.MBC)도 생겼다.

5백52번째 한글날이 든 10월을 맞아 한글학자 정태진 선생이 "이달의
문화인물"로 정해지고 갖가지 기념행사가 펼쳐진다.

9일엔 연세대 언어정보개발연구원이 한국인의 일상용어를 골라 다양한
용례와 함께 편찬한 실용사전이 간행된다.

그러나 중요한 건 행사가 아니다.

"한글만 써야 한다" "한자도 섞어 써야 한다"는 논쟁에 매달리기보다
아름답고 명료한 말의 입.출력을 늘리는 일에 힘써야 한다.

억지로 만들 수도, 우격다짐으로 몰아낼 수도 없는 게 언어다.

김수영 서정주 박완서 이문열 최명희 김용택의 작품이 주는 감동의 절반
이상은 우리말의 풍성함에 있다.

말은 인격과 사고를 담는 그릇이다.

세상이 급변하는 만큼 새롭게 편입되는 말도 많다.

요즘엔 영화제목에서 비롯된 "이보다 ...할 수 없다"와 광고에서 따온
"무늬만 ...다"가 대유행이다.

"쓰임은 궁극적 근거"라고 한다.

하지만 이윤기씨의 주장처럼 말의 실험실은 무균실이어서는 안된다.

"말이 오르면 나라가 오른다"는 주시경 선생의 고언이 새롭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