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를 역사적인 측면에서 돌이켜 본다면 두개의 시대상으로 나눌수
있다.

하나는 경제의 시대요, 또 하나는 정치가 우선한 시대다.

이것을 역사 속에 맞추어 본다면 고려시대가 경제의 시대라고 말할수 있으며
조선시대는 정치의 시대였다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때의 한.일관계를 돌이켜 보면 대조적인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고려의 수도 개성에는 송과 일본의 상인들이 왕래하고 송의 서긍은 그러한
번화함을 고려도경에 기술하고 있다.

그러면 무엇때문에 고려시대의 동아시아에는 전쟁이 드물었고 경제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던 것일까.

그것은 송이 중국의 역대왕조 중에서도 가장약체였던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금과 요의 간섭을 받았던 송에서는 군사적 약세를 경제활동으로 보충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왜구는 아직 발호하지 않았었다.

교역을 촉구하며 왜구가 일어난 것은 고려가 원의 책봉체제하에 들어가
자유무역체제가 붕괴된 탓이다.

게다가 왜구에는 일본인 뿐만 아니라 왜인을 닮은 고려와 조선의 사람들이
많이 포함돼 있었다.

자유무역의 잇점을 모두가 잘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가 되자 경제정책은 일변해 통제경제적이 되고 "정치의 시대"를
맞게 됐다.

특히 세종의 대마도정벌은 그후의 한일관계를 밑바닥에서부터 변화시킨
계기가 됐다.

1419년 세종은 대마도정벌의 명을 내렸지만 그것은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공격한 것이 됐다.

대마도에서는 전년부터 기근이 닥쳐 식량이 궁해진 사람들이 조선근해에
출몰했는데 그것을 왜구의 습격으로 간주한 세종이 그들이 섬으로 돌아가기
전 대마도공격명령을 내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무렵 왜구는 거의 없어지고 정종도 왜구대책을 대폭적으로
완화하고 있었다.

그같은 점에서 세종의 대마도정벌은 대단히 정치적이었다고 말할수 있다.

대마도정벌후 조선측은 대마도와의 사이에 교역량을 한정하고 일본측을
견제하려고 했지만 중종, 명종시대에는 일본측의 무역확대요구에 응할수
없게 돼 갔다.

통제경제적인 조선과 시장경제적인 일본에서는 그정도로 경제격차가 확대돼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일이 어떻게 공생해야 하는가의 힌트는 이 두개의 시대상 속에
있다.

시모조 마사오 < 인천대 객원교수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2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