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입삼 회고록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 (18) '장면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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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정부의 공과 ]]
대한민국 역대정권 중에서 장면 정권 만큼 명암이 엇갈리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8개월이란 단명이었기에 이 정부의 공적을 찾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장면 정부의 경제면에서의 치적은 가히 역사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 뒤를 이은 5.16 군사정권의 초기 3~4년과 비교해 보면 더욱 그렇다.
장면 정권은 왜 정권을 빼앗겼을까.
당사자들의 증언을 통해 알아보자.
77년께 어느 날이었다.
당시 전경련 수석부회장인 주요한 선생에게 왜 정권을 그렇게 쉽게 뺏겼는지
물었다.
주 선생은 장면내각에서 부흥.상공장관을 지냈었다.
주 선생은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61년 5월13일.
주요한 장관은 부산상공인들과의 간담회를 위해 부산에 내려갔다.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부산지역 기업인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쿠데타가 임박했다"는 것이었다.
주동자가 박정희 소장이라고도 했다.
뜬 소문이 아닌 듯해 그는 서울로 권중돈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권 장관.
부산에 내려오니 군사쿠데타가 곧 일어날 것이라고 민심이 말이 아니야.
박정희 소장이 주동자라고들 하오"
"그래요.
장도영 육참총장에게 알아보고 회신하겠소"
장 총장은 권 장관에게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라고 했고 주 장관도 그렇게
답변을 들었다.
민초들이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을 국방장관이 몰랐던 것이다.
장면 총리 자신의 회고록에도 이는 잘 드러나있다.
민심이 흉흉하다보니 장 총리에게도 쿠데타 정보가 들어왔다.
5.16 1주일 전이었다.
장 총리는 장도영 총장을 불러 사실여부를 물었다.
"유언비어"에 불과하다는 게 장 총장의 보고였다.
그러다 마침내 5월16일 새벽 일이 터지고 말았다.
2시께 장면 총리에게 장 총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30사단에서 장난을 하려는 것을 막아놓고 지금 해병대, 공수부대가
입경하려는 것을 한강에서 저지시키고 있습니다"
"1주일 전에 내가 말한 바로 그것 아닌가"
"아니 별 것 아닙니다.
염려마시고 제게 맡기십시오"
"염려말라는 말만 말고 나에게 곧 와 줘.
와서 직접 자세히 보고를 하게"
"네, 곧 가겠습니다"
그러나 장 총장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장 총리는 군인들이 들이닥치기 10분전에야 반도호텔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처구니없기까지 한 정권붕괴의 순간이었다.
흔히들 장면 정부를 "무능하고 부패"했다고 한다.
5.16 군사정권이 그들의 쿠데타를 정당화하려고 이 점들을 특히 강조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면 장면 정권은 부패와는 거리가 멀었다.
집권기간이 짧아 부패할 틈도 없었다.
무능하다는 평가도 제대로 짚어봐야 한다.
국민이 맡긴 정권을 쿠데타로 빼앗긴 것, 이 점은 두고두고 무능했다는
평가로 역사에 각인될 것이다.
그러나 "무능시비"는 여기서 끝나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장면 정부의 경제적 업적은 이미 여러차례 얘기한 것처럼 오늘날까지도
그 여운과 아쉬움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장면 정부는 무능했다기보다 "무기력"
했다는 것이 더 적절하다.
혁명기나 격변기의 정권은 폭력성을 가져야 하는 것이 인류역사의 슬픈
단면이다.
그러나 장면 정권은 폭력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인재로 구성돼 있었다.
이승만과 같이 주위를 압도하는 카리스마도 없었다.
권력의 속성인 시퍼런 서슬조차도 찾을 수 없었다.
자유당 정권의 받침목이었던 경찰력은 4.19이후 무력화됐다.
믿는 것은 뜬 구름 같은 민심이요, 선출된 정권이라는 정당성과 미국의
우호적 지지 뿐이었다.
레닌은 "혁명전략론"에서 혁명은 "약한 꼬리"에서 이뤄진다고 지적했다.
장면 정부의 약한 꼬리는 바로 군부통제력이었다.
4.19후 과도정권인 허정 정부는 국방장관에 당시 국군의 대표격인 이종찬
장군을 기용했었다.
그러나 장면 내각에는 군 경력을 가진 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역사의 긴 눈으로 볼 때 장면 정부는 그림자보다는 빛이 더 뚜렷이
나타난다.
제2공화국 경제정책의 큰 줄기는 "한강의 기적"의 원류와 직접 이어진다.
특히 "경제제일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선각경제인들과 함께 시장경제의
기틀을 구축하려는 의도와 노력은 다시 평가받아야 한다.
"경제제일주의"는 "윤리제일주의"의 뒷받침 속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
그리고 뭇 상행위는 정직과 준법을 바탕으로 한 신용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요즘 얘기되는 "글로벌 스탠더드"인 것이다.
장면 총리의 셋째 영식인 장익 주교가 최근 사무실에 왔었다.
"선친은 깊은 신앙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5.16후 무력진압의 기회도 있었지만 피의 폭력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포기했다고 하셨지요.
폭력은 폭력을 가져온다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라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이에 나는 "인도 간디의 비폭력주의가 떠오릅니다"고 알듯 모를듯한 말로
대꾸했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3일자 ).
대한민국 역대정권 중에서 장면 정권 만큼 명암이 엇갈리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8개월이란 단명이었기에 이 정부의 공적을 찾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장면 정부의 경제면에서의 치적은 가히 역사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 뒤를 이은 5.16 군사정권의 초기 3~4년과 비교해 보면 더욱 그렇다.
장면 정권은 왜 정권을 빼앗겼을까.
당사자들의 증언을 통해 알아보자.
77년께 어느 날이었다.
당시 전경련 수석부회장인 주요한 선생에게 왜 정권을 그렇게 쉽게 뺏겼는지
물었다.
주 선생은 장면내각에서 부흥.상공장관을 지냈었다.
주 선생은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61년 5월13일.
주요한 장관은 부산상공인들과의 간담회를 위해 부산에 내려갔다.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부산지역 기업인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쿠데타가 임박했다"는 것이었다.
주동자가 박정희 소장이라고도 했다.
뜬 소문이 아닌 듯해 그는 서울로 권중돈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권 장관.
부산에 내려오니 군사쿠데타가 곧 일어날 것이라고 민심이 말이 아니야.
박정희 소장이 주동자라고들 하오"
"그래요.
장도영 육참총장에게 알아보고 회신하겠소"
장 총장은 권 장관에게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라고 했고 주 장관도 그렇게
답변을 들었다.
민초들이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을 국방장관이 몰랐던 것이다.
장면 총리 자신의 회고록에도 이는 잘 드러나있다.
민심이 흉흉하다보니 장 총리에게도 쿠데타 정보가 들어왔다.
5.16 1주일 전이었다.
장 총리는 장도영 총장을 불러 사실여부를 물었다.
"유언비어"에 불과하다는 게 장 총장의 보고였다.
그러다 마침내 5월16일 새벽 일이 터지고 말았다.
2시께 장면 총리에게 장 총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30사단에서 장난을 하려는 것을 막아놓고 지금 해병대, 공수부대가
입경하려는 것을 한강에서 저지시키고 있습니다"
"1주일 전에 내가 말한 바로 그것 아닌가"
"아니 별 것 아닙니다.
염려마시고 제게 맡기십시오"
"염려말라는 말만 말고 나에게 곧 와 줘.
와서 직접 자세히 보고를 하게"
"네, 곧 가겠습니다"
그러나 장 총장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장 총리는 군인들이 들이닥치기 10분전에야 반도호텔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처구니없기까지 한 정권붕괴의 순간이었다.
흔히들 장면 정부를 "무능하고 부패"했다고 한다.
5.16 군사정권이 그들의 쿠데타를 정당화하려고 이 점들을 특히 강조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면 장면 정권은 부패와는 거리가 멀었다.
집권기간이 짧아 부패할 틈도 없었다.
무능하다는 평가도 제대로 짚어봐야 한다.
국민이 맡긴 정권을 쿠데타로 빼앗긴 것, 이 점은 두고두고 무능했다는
평가로 역사에 각인될 것이다.
그러나 "무능시비"는 여기서 끝나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장면 정부의 경제적 업적은 이미 여러차례 얘기한 것처럼 오늘날까지도
그 여운과 아쉬움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장면 정부는 무능했다기보다 "무기력"
했다는 것이 더 적절하다.
혁명기나 격변기의 정권은 폭력성을 가져야 하는 것이 인류역사의 슬픈
단면이다.
그러나 장면 정권은 폭력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인재로 구성돼 있었다.
이승만과 같이 주위를 압도하는 카리스마도 없었다.
권력의 속성인 시퍼런 서슬조차도 찾을 수 없었다.
자유당 정권의 받침목이었던 경찰력은 4.19이후 무력화됐다.
믿는 것은 뜬 구름 같은 민심이요, 선출된 정권이라는 정당성과 미국의
우호적 지지 뿐이었다.
레닌은 "혁명전략론"에서 혁명은 "약한 꼬리"에서 이뤄진다고 지적했다.
장면 정부의 약한 꼬리는 바로 군부통제력이었다.
4.19후 과도정권인 허정 정부는 국방장관에 당시 국군의 대표격인 이종찬
장군을 기용했었다.
그러나 장면 내각에는 군 경력을 가진 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역사의 긴 눈으로 볼 때 장면 정부는 그림자보다는 빛이 더 뚜렷이
나타난다.
제2공화국 경제정책의 큰 줄기는 "한강의 기적"의 원류와 직접 이어진다.
특히 "경제제일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선각경제인들과 함께 시장경제의
기틀을 구축하려는 의도와 노력은 다시 평가받아야 한다.
"경제제일주의"는 "윤리제일주의"의 뒷받침 속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
그리고 뭇 상행위는 정직과 준법을 바탕으로 한 신용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요즘 얘기되는 "글로벌 스탠더드"인 것이다.
장면 총리의 셋째 영식인 장익 주교가 최근 사무실에 왔었다.
"선친은 깊은 신앙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5.16후 무력진압의 기회도 있었지만 피의 폭력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포기했다고 하셨지요.
폭력은 폭력을 가져온다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라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이에 나는 "인도 간디의 비폭력주의가 떠오릅니다"고 알듯 모를듯한 말로
대꾸했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