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트즈니사의 최고경영자(CEO)인 마이클 아이즈너 회장은 디즈니를
10년만에 6배 규모의 초일류 회사로 탈바꿈시킨 장본인이다.

아이즈너 회장 취임당시 디즈니는 수익률과 브랜드 가치가 추락하던
부채덩어리였다.

그는 방향성을 잃었던 디즈니사에 비전을 불어 넣었고, 회사 구조개편을
통해 비전을 실현시킬수 있는 힘, 즉 창조력을 발휘할수 있는 조직으로
재생시켰다.

다각화를 통한 전략적 사업확장은 이 힘을 수익으로 환원시킬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가 되었다.

지난 1984년 아이즈너회장이 CEO로 디즈니사에 들어올 당시 회사 이익은
3년간 계속 하락했다.

그결과 80년 1억 3천5백만 달러에 이르던 수익이 83년에는 9천3백만
달러에 그쳤다.

캘리포니아와 플로리다에 있는 놀이공원 입장객 수는 취임직전 4년중
3년이 전년도에 비해 하락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었다.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었고, 할리우드의 미키마우스 인형 판매고는 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월트디즈니 영화를 보기 위해 줄을 서는 사람이 없어 한때
할리우드의 선두 주자였던 디즈니는 이미 2류 회사로 전락했다.

디즈니의 할리우드 영화시장 점유율은 4%에 불과했다.

당시 디즈니 경영은 부동산 운용에 치우쳐 있었다.

반면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창조적인 사업분야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이는 회사 설립자인 두 형제 월트와 로이의 사망 이후 회사를 지탱하고
있던 리더쉽이 무너진 탓이었다.

의사결정력이 약화된 결과였다.

아이즈너 회장은 비전을 제시하고 유능한 인력을 뽑는데 주력했다.

조직재편을 통해 창조적 조직을 만들고 사업도 다각화했다.

아이즈너회장의 경영혁신은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발전돼 왔다.

우선, 아이즈너회장은 회사의 비전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계획들을
세웠다.

그가 디즈니로 옮겨온 뒤 가장 처음 시도한 일은 "5년 계획"을 발표한
것이었다.

이 계획은 1년에 12편의 영화와 1편의 만화영화를 만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디즈니의 고전과 비디오를 이용, 공격적인 시장공략에 나선다는 전략도
포함됐다.

또 디즈니캐릭터 용품 전문점도 운영키로 했다.

이처럼 디즈니 종사자들이 비전과 목적의식을 가지고 일한다는 점은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막강한 힘이 됐다.

둘째, 창의적인 조직을 만들기 위해 인재를 모으고 조직문화를 개편했다.

먼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핵심 자산인 최고 인력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기존의 취약한 연봉구조를 뜯어고쳤다.

그는 높은 급료를 내세워 유능한 간부들을 영입했으며 스톡옵션제도를
제시하고 성과에 따른 보너스제도를 도입해 조직원들의 의욕을 고취시켰다.

이러한 인센티브 제도를 통해 할리우드 최고인재들을 유인했다.

셋째, 조직을 좀더 효율적이고 창의적으로 바꿨다.

지위고하를 막론한 상호간의 비평이 가능한 조직이야말로 새로운
아이디어의 원천이란게 그의 지론이었다.

아이즈너회장은 개방적인 문화를 위해 의사결정을 "신속한 하의상달식"으로
바꿨다.

직원들의 제안에 대한 피드백도 활성화했다.

"내 아이디어가 의사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구나"하는 느낌을
직원들에게 주기 위한 조치였다.

"가족적인"분위기를 조성,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올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디즈니의 "공쇼(Gong Show)"는 이러한 디즈니의 조직 분위기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참석자들의 적극적인 참여 유도를 위하여, 좋지 않는 아이디어를 제시할
경우에는 종소리를 크게 울리게 함으로써 생동감 있는 아이디어 교환 및
창출이 이루어지게 하는 일종의 아이디어 회의였다.

디즈니의 모든 종사자들은 이 공쇼에 1년에 세 번 참석할 수 있었다.

아이디어를 가진 종업원들 입장에서는 아이즈너회장등 경영진에게
자기 의견을 개진할 좋은 계기가 됐다.

실제 임시 직원과 비서들을 포함해 40명 이상의 직원이 매 회의에서
영화에 관한 아이디어를 발표했다.

아이즈너 회장은 공쇼등을 통해 조직을 팀웍 중심으로 바꿔갔다.

파라마운트사에서의 경험을 통해 아이즈너회장은 그룹 미팅이 작업
능률을 높여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영화각본 아이디어를 토의하는 일에서 뿐만 아니라 창의적 사업계획을
짤때도 그룹 미팅을 적용했다.

이는 효과적인 아이디어를 가능하게 했다.

이런 미팅은 인어공주와 같은 대히트 만화영화를 제작하는데 밑거름이
됐다.

넷째, 아이즈너회장은 기존 영화사업과 테마파크 사업 중심의 다각화를
실시했다.

먼저 테마파크는 확실한 현금확보의 원천으로 다른 투자의 재원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시했다.

비록 놀이공원 사업의 수익성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공원의 막대한
부동산을 엄청난 잠재력으로 보았다.

그가 특별히 영화사업에 큰 매력을 느꼈던 이유는 한 영화의 성공이
엄청난 수익을 보장해준다는 점에서였다.

5년 주기로 극장에서 재개봉하던 기존의 영화전략을 과감히 폐기했다.

그리고 보관창고에서 먼지에 덮여 있던 필름들을 꺼내 홈비디오 시장에
출시했다.

그의 캐릭터 사업전략은 "시너지 경영"의 전형을 보여줬다.

디즈니라는 브랜드 위력을 캐릭터 사업과 연결시켜 전세계 550여곳에
캐릭터 매장을 열었다.

캐릭터사업의 성공과 여기서 얻어지는 지명도는 다시 비디오 판매증가와
테마파크의 이벤트로 이어졌다.

프랑스 파리와 일본 도쿄의 디즈니랜드도 이런 시너지 경영의 토대위에
가능했던것이다.

최근 캐피탈시티/ABC와의 합병은 디즈니사가 종합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리더로서 꾸준히 성장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진전이다.

< AT커니 조좌진 컨설턴트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