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회장 일가의 북한 7박8일] (5) '고향집 푸근해 단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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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회장 일가의 북한 7박8일"은 방북단 15명의 증언을 토대로 본사 기자가
재구성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정순영 성우 명예회장, 정세영 현대자동차 명예회장,
정상영 KCC 회장 등 정주영 명예회장의 동생들을 지칭합니다.
< 편집자 >
----------------------------------------------------------------------
집은 꽤나 넓어 보였다.
형님(정주영 명예회장)은 10년전 왔을 때보다 집이 훨씬 커졌다고 했다.
고향집에는 벌써부터 많은 친척들이 와 있었다.
그러나 작은어머니를 제외하곤 아무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사촌들이 돌아가며 인사를 하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가장 보고 싶던 사촌누이 세분이 이미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몽구와 몽헌은 더 머쓱한 표정이었다.
그나마 작은어머니가 살아계셔서 다행이었다.
작은어머니는 세영과 상영이를 보고 "너희가 세영이와 상영이냐, 내가
업어주던게 엊그젠데..."라며 눈물을 흘리셨다.
몽구와 몽헌이도 앞에 앉혀놓고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구나"라며 안타까워
하셨다.
몽구 몽헌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데 말이다.
형님도 인사하는 친척들의 손을 일일이 잡으며 반가워 했다.
뒷산의 할아버지 묘소에 성묘했다.
지금이라도 할아버지 산소에 술이라도 붓게 된 것이 여간 다행이 아니다.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을 내려와보니 저녁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푸짐한 잔칫상이었다.
산과 바다와 맞닿아 있는 동네여서 나물과 해산물이 반찬의 주류였다.
맥주와 인삼주도 상에 올랐다.
친척들이 모두 모였지만 다소 서먹서먹한 자리기도 했다.
저녁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금강산으로 향했다.
숙소인 금강산초대소로 가기 위해서다.
고향집에서 금강산까지는 한시간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제 금강산 얘기다.
우리는 아침 일찍 금강산 초입인 모란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뒤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형님은 5백m쯤을 걸어 오르다 힘에 부친듯 산행을 포기했다.
기력에 따라 구룡폭포까지 오른 사람들도 있고 상영이를 비롯한 젊은
친구들은 비로봉까지 올랐다.
사실 형님이야 금강산을 오솔길까지 속속들이 잘 안다지만 우리는 금강산을
잘 알지 못한다.
바로 옆이 고향이라 해도 워낙 어려서 고향을 떠난데다 그때 기억도 별로
남은 것이 없다.
금강산에 오르기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그러나 금강산은 결코 우리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곧 금강산 관광을 가게될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기대를 크게 하라는
것이다.
그래도 결코 실망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산이 그렇게까지 생길 수 있으리라고는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1만2천봉의 기기묘묘한 봉우리를 어떻게 눈에 담아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금강산은 산세도 그렇지만 워낙 깨끗하다.
설악산은 등반하다보면 개울가에 낙엽들이 쌓여 조금 지저분해 보인다.
그러나 금강산의 개울에는 낙엽이 하나도 없다.
급경사라 낙엽들이 모두 물에 쓸려 내려가기 때문이라는게 안내원들의
설명이다.
어쨌든 바위틈새 깨끗한 물만 흘러갈 뿐 어디 한 군데 더러운 곳이 없다.
등반을 마치고 내려왔을 때 "거봐라, 설악산은 금강산의 자투리라고 하지
않더냐"는 형님의 말에 모두 박장대소한 것은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직접
확인했기 때문일게다.
산을 내려올때는 갑자기 안개가 끼었다.
이제 좀더 자세히 산을 보려했는데 말이다.
상영이는 "다시 한번 들러 꼭 자세히 보라는 묵시가 아니겠냐"고 말해 또
한번 웃었다.
그때 피워문 "영광"담배 맛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산을 내려와 온정리에서 온천을 한 우리 일행은 이른 저녁을 먹고 다시
고향집을 찾았다.
고향집에서 하룻밤 묵고 가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날 오랜만에 푹 잠을 잘 수 있었다.
작은어머니 옆에서 자던 예순셋 나이의 동영(상영의 아명)이는 잠이
험해선지, 아니면 일부러 그랬는지 작은어머니의 팔을 베고 잤다.
고향집에 왔다는 안도감이 서서히 밀려왔다.
역시 고향만큼 좋은 곳은 없나보다.
< 정리=김정호 기자 jhki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29일자 ).
재구성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정순영 성우 명예회장, 정세영 현대자동차 명예회장,
정상영 KCC 회장 등 정주영 명예회장의 동생들을 지칭합니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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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꽤나 넓어 보였다.
형님(정주영 명예회장)은 10년전 왔을 때보다 집이 훨씬 커졌다고 했다.
고향집에는 벌써부터 많은 친척들이 와 있었다.
그러나 작은어머니를 제외하곤 아무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사촌들이 돌아가며 인사를 하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가장 보고 싶던 사촌누이 세분이 이미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몽구와 몽헌은 더 머쓱한 표정이었다.
그나마 작은어머니가 살아계셔서 다행이었다.
작은어머니는 세영과 상영이를 보고 "너희가 세영이와 상영이냐, 내가
업어주던게 엊그젠데..."라며 눈물을 흘리셨다.
몽구와 몽헌이도 앞에 앉혀놓고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구나"라며 안타까워
하셨다.
몽구 몽헌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데 말이다.
형님도 인사하는 친척들의 손을 일일이 잡으며 반가워 했다.
뒷산의 할아버지 묘소에 성묘했다.
지금이라도 할아버지 산소에 술이라도 붓게 된 것이 여간 다행이 아니다.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을 내려와보니 저녁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푸짐한 잔칫상이었다.
산과 바다와 맞닿아 있는 동네여서 나물과 해산물이 반찬의 주류였다.
맥주와 인삼주도 상에 올랐다.
친척들이 모두 모였지만 다소 서먹서먹한 자리기도 했다.
저녁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금강산으로 향했다.
숙소인 금강산초대소로 가기 위해서다.
고향집에서 금강산까지는 한시간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제 금강산 얘기다.
우리는 아침 일찍 금강산 초입인 모란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뒤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형님은 5백m쯤을 걸어 오르다 힘에 부친듯 산행을 포기했다.
기력에 따라 구룡폭포까지 오른 사람들도 있고 상영이를 비롯한 젊은
친구들은 비로봉까지 올랐다.
사실 형님이야 금강산을 오솔길까지 속속들이 잘 안다지만 우리는 금강산을
잘 알지 못한다.
바로 옆이 고향이라 해도 워낙 어려서 고향을 떠난데다 그때 기억도 별로
남은 것이 없다.
금강산에 오르기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그러나 금강산은 결코 우리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곧 금강산 관광을 가게될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기대를 크게 하라는
것이다.
그래도 결코 실망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산이 그렇게까지 생길 수 있으리라고는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1만2천봉의 기기묘묘한 봉우리를 어떻게 눈에 담아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금강산은 산세도 그렇지만 워낙 깨끗하다.
설악산은 등반하다보면 개울가에 낙엽들이 쌓여 조금 지저분해 보인다.
그러나 금강산의 개울에는 낙엽이 하나도 없다.
급경사라 낙엽들이 모두 물에 쓸려 내려가기 때문이라는게 안내원들의
설명이다.
어쨌든 바위틈새 깨끗한 물만 흘러갈 뿐 어디 한 군데 더러운 곳이 없다.
등반을 마치고 내려왔을 때 "거봐라, 설악산은 금강산의 자투리라고 하지
않더냐"는 형님의 말에 모두 박장대소한 것은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직접
확인했기 때문일게다.
산을 내려올때는 갑자기 안개가 끼었다.
이제 좀더 자세히 산을 보려했는데 말이다.
상영이는 "다시 한번 들러 꼭 자세히 보라는 묵시가 아니겠냐"고 말해 또
한번 웃었다.
그때 피워문 "영광"담배 맛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산을 내려와 온정리에서 온천을 한 우리 일행은 이른 저녁을 먹고 다시
고향집을 찾았다.
고향집에서 하룻밤 묵고 가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날 오랜만에 푹 잠을 잘 수 있었다.
작은어머니 옆에서 자던 예순셋 나이의 동영(상영의 아명)이는 잠이
험해선지, 아니면 일부러 그랬는지 작은어머니의 팔을 베고 잤다.
고향집에 왔다는 안도감이 서서히 밀려왔다.
역시 고향만큼 좋은 곳은 없나보다.
< 정리=김정호 기자 jhki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