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기업을 조속히 정리해야 한다는데 반대할 이유는 없다.

우리도 전적으로 견해를 같이 한다.

그러나 지난 3일 금융감독위원회가 은행들에 대해 부실기업판정을 다시
검토하도록 지시한 것은 문제가 많다.

은행들의 퇴출기업 선정내용이 미흡하다는 정부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또 기업의 신속한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는 시급성도 동감한다.

다만 우리는 정부가 제시했던 원칙을 번복함으로써 정책의 일관성에 또
하나의 흠집을 남긴데 대해 우려를 갖지않을수 없다.

금융감독위원회는 은행들이 자율적으로 결정한 부실기업판정결과가 극히
미흡하다고 생각돼 5대그룹 계열사를 포함한 대기업도 예외없이 대상에
포함시켜 최종명단을 오는 20일까지 공표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은행들의 판정결과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알려진대로 5대그룹 계열사는 한곳도 없고 전체 퇴출대상기업도 20여개
안팎에 그쳤다면 은행들의 부실기업판정결과가 부실했지 않느냐는 비판은
받을만하다.

또 박지원 청와대대변인이 4일 설명한대로 5대그룹이라고 해서 부실기업을
퇴출시키지 않거나 예외적으로 자율에 맡겨져야 한다는 것도 비논리다.

그러나 정부가 스스로 정한 원칙을 뒤집는 것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5대그룹의 경우 이미 은행과 재무약정을 체결해 계열기업정리는
물론 부채감축계획 등을 제출해 놓은 상태여서 정부도 그 계획에 따라
자율추진토록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문제는 그런 식의 정부개입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월 시중은행장 선임도 그랬고, 대기업과 거래은행간의 재무약정체결도
그랬었다.

언제까지 그런 시행착오가 계속될 것인가.

가뜩이나 정부의 잦은 정책혼선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마당에 스스로
정부신뢰성을 떨어뜨리는 자해행위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부실기업정리를 시한을 정해 놓고 속칭 생살부를 만드는 것 자체가 올바른
방법이라고 보지 않는다.

은행들의 일상적인 여신심사과정에서 할 일이다.

일괄 정리하고 나면 다시는 부실기업이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때문에 IMF체제라는 비상경제체제하에서 대외신인도회복을 위해 일괄정리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더라도 이번 판정결과가 미흡하다면 빠른 시일내에 보완
하면 그만이다.

더구나 그같은 결정이 노사문제와 국민정서 등 정치적 판단이 고려됐다면
더욱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현재 진행중인 굵직한 현안들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당장 진행중에 있는 은행합병등 금융산업구조조정만해도 이해관계가 첨예
하게 대립되는 사안이다.

그때마다 자율조정이 정부마음에 들지 않거나 국민여론이 나빠지면 원칙을
수정하고 재검토해야만 하는 것인가.

잘못된 것을 시정하는 과정도 시장자율에 맡기는 것이 관치경제의 탈피다.

그럴 인내심이 없다면 아예 처음부터 객관적인 기준과 가이드라인을 제시
하는 것이 낭비를 줄이는 길이다.

부실기업정리의 정부역할과 책임한계를 좀더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