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 남명 조식(1501~1572)선생의
사상과 학문을 연구하기위해 지난 86년 설립됐다.

연구원은 선생의 제자들과 사숙인물들로 맥을 이어온 남명학파(강우학파)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조직은 7명의 상임연구위원과 40명의 연구위원, 그리고 13명의 해외
객원연구위원들로 구성돼 있다.

또한 이사 1백35명, 정회원 7백여명, 일반회원 2백여명을 두고 있다.

남명 선생의 자는 건중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1501년 6월26일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의 외가에서 아버지 언형과 어머니
인천 이씨(충순위 국의 따님)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가는 삼가의
판현이었다.

그의 학문은 이론보다는 실천을 중시했는데, 그 요체는 경과 의로 집약된다.

이는 주역의 "경이직내 의이방외(경으로써 마음을 바르게 하고 의로써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특히 의를 강조해 이에 맞지 않는 행동은 칼로 자르듯 했다.

실천을 중시한 면모인 것이다.

선생은 또 참된 선비정신의 전형이었다.

이른바 "천자도 신하 삼을 수 없고, 제후도 벗삼을 수 없는" 처사로서
모범을 보였다.

즉 평생동안 10여차례 벼슬을 제수받았지만 당시 상황이 벼슬하여 뜻을
펼 시기가 아님을 알고 학문수양과 후진양성에만 몰두했다.

선생은 사림의 언로도 열었다.

당시 왕권주의시대에서는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직언을 목숨 걸고 상소,
국정의 잘못과 백성의 곤궁함을 지적했다.

선생이 후대에 끼친 가장 큰 공적은 수많은 제자를 양성,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케 한 것이다.

임진왜란서 나라를 구한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 50여명이 넘는 의병장들이
모두 선생의 제자였다.

남명학연구원은 선생의 학문과 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94년 사단법인으로
거듭났다.

또한 참된 민족주체정신을 회복하는데 기여하고자 국제학술회의 개최를
비롯, 각종 기념사업과 홍보활동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

김경수 < 남명학연구원 사무국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5월 3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