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들이 일본에 들르면 반드시 찾는 물건이 있다.

바로 "회칼"이다.

자랑삼아 집안에 보관하기 위해서다.

유명한 "쌍둥이표 칼"을 세계에 수출하고 있는 독일인이 "하찮은" 회칼을
사가는데는 이유가 있다.

회칼이 수십년동안 요리수련을 거쳐 도를 얻은 주방장만이 잡을수 있는
"신성한" 물건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일본이 일식을 세계에 전파하면서 전통음식에 얽힌 갖가지 이야기를 널리
알린 결과다.

단순한 칼이 당당한 문화상품으로 대접받고 있는 배경에는 일본인들의
이런 노력이 깔려있다.

"사시미"(회)와 "쓰시"(초밥)가 서양에서 고급 음식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회칼이야기는 아직 이렇다할 문화상품을 개발하지 못한 우리에게 한가지
교훈을 준다.

우리에게도 소재는 무궁무진하다는 깨달음이다.

따져보면 우리에겐 문화상품으로 만들만한 유형무형의 자산이 수없이 많다.

석굴암 불국사 해인사 설악산 한려수도 등 사찰이나 명소를 비롯 탈춤
판소리 사물놀이 태권도 김치 씨름 한복 한지 등 헤아릴수조차 없을 정도다.

도처에서 전승되고 있는 신화나 전설, 심지어 맑은 가을하늘도 훌륭한
문화상품 소재가 될수있다.

이들 소재를 가공하는 손재주도 뛰어나다.

만화영화(애니메이션)가 그 단적인 증거다.

한국은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3위의 애니메이션 생산대국이다.

종사인력만도 5만명에 달한다.

어딜가도 "손재주 하나만은 넘버원"(미 클래스키쥬퍼사 테리 토렌사장)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대장경을 목판으로 만들어 수백년동안 온전하게 보관한 사례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도 우리가 문화산업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
이다.

"머리"를 덜 썼기 때문이다.

아예 머리를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창의력을 발휘하고 아이디어를 동원, 문화를 "상품"으로 가공해 내기보다는
단순재생산에 그쳐온 탓이다.

우리의 씨름과 일본의 스모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단적으로 드러난다.

씨름에는 승부만 있을뿐 "이야기"가 없다.

관심은 온통 누가 이겨서 상금을 얼마나 차지했냐에 쏠려 있다.

이에비해 스모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이벤트다.

전통예법이 등장하고 일본의 고유문화가 재현된다.

참관객은 스모를 보면서 일본문화를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스모를 본 외국인이 은연중 일본 제품을 고급품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만화영화 산업을 보면 그 차이는 더 극명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창작물을 내지 못한채 미국이나 일본의 하청을 받는 단순작업에
의존,생산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57억달러 규모의 세계 애니메이션시장 가운데 우리나라가 자체적으로 만든
만화영화의 점유율은 1%에도 못미친다.

3대 생산대국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미국과 일본의 하청생산이 거의 전부인 까닭이다.

우리는 단순노동으로 "죽도록" 고생만 하고 실속은 엉뚱한 나라가 챙기는
셈이다.

다른 산업도 비슷하겠지만 창작과 하청은 결과에서 이처럼 엄청난 차이로
나타난다.

문화산업은 창의력에 승부를 걸어야 하는 산업이다.

요즘같은 정보화시대엔 국가경쟁력도 따지고 보면 창의력에 의해 판가름
난다고 할수 있다.

다행히 우리에겐 문화산업을 일으킬수 있는 소재가 많다.

문제는 그 소재를 어떻게 가공하고 상품화하느냐이다.

그래서 "소재에 살을 붙이는 문화적 해석력을 키우는 것이 문화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길"(김민수 서울대교수)이란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이다.

< 강현철 기자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3월 3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