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원의 김진표 국장은 96년 10월8일 은행보험 심의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축하를 받을 틈도 없이 그에게 처음 올라온 결재서류는 "기아특수강의
해외채무에 대한 은행권의 협조융자에 관한 건"이었다.

통상산업부로부터 넘어온 협조공문이었다.

은행에서 막아주지 않으면 부도날 금액은 2천8백만달러.

채무총액이 9조8천억원에 달하는 재계 8위 기아호 침몰의 서막이었다.

김 국장은 "정말 기가 막혔다.

명색 기아가 이런 정도냐고 깜짝 놀랐다.

다른 대기업도 조사를 시켰는데 큰 차이가 없었다.

물론 당시만해도 기아가 바로 무너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로부터 기아호의 침몰(부도협약)까지 10개월이 걸렸다.

기아문제는 부도협약 대상기업으로 지정된 7월15일부터 10월24일 법정관리
로 들어섰던 1백일 동안 한국경제 전체를 외환대란의 동반자살로 끌고가는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태풍의 눈이었다.

한보가 서막이라면 기아는 클라이맥스였다.

홍콩 사태 이후의 과정은 피날레에 불과했다.

이야기를 강경식 부총리 취임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자.

강경식 부총리는 취임 열흘이 채되지 않은 지난해 3월15일 금융정책실
관계자들에게 일요일인 16일에 모두 출근하라고 지시했다.

다음날 사무실에 출근한 관계자들은 부총리로부터 놀라운 지시를 들었다.

"강부총리는 이대로는 나라가 망한다며 기업들의 채무를 동결시키는 긴급
재정명령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사실 나중에 부도협약이 적용됐던
대부분 기업들이 당시에 이미 동반 부도에 직면해 있었다"(재경원 관계자)

8.3조치를 연상케 하는 강부총리의 긴급재정명령 검토 지시는 금정실내에서
격론을 불러 일으켰다.

긴급명령을 대체할만한 강력한 채무동결 방안이 없겠느냐는 논의가 계속
됐다.

대안으로 나온 것이 운명의 부도유예협약이었다.

다음은 윤증현 금정실장의 증언.

"그 방법 외엔 연쇄부도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채권자와 채무자가 협의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만들어 주자는 것이 부도유예협약의 취지였다.
그러나 기아가 이를 철저히 악용했던 것이다"

그는 "철저히"라는 말을 몇번이고 반복했다.

기아호의 침몰을 예견했던 것은 아니지만 대형부도를 처리하기 위한
매커니즘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정작 은행들로부터 반발이 일었다.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이라는 비판이었다.

은행감독원의 실무 수정작업이 반복된 끝에 한달만인 4월15일 부도협약이
탄생했다.

부도협약이 오히려 부도를 촉발시킬 것이라는 비난도 컸다.

이 사이에 거대한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기아였다.

4월이 지나 5월로 접어들면서 사태는 심각해졌다.

제일은행을 중심으로 기아 채권은행장 회의가 열리기 시작했다.

다음은 김진표 국장의 증언.

"관련 은행들의 임원급 회의만도 부도협약전에 무려 30차례나 열렸다.
기아가 음모설을 제기한 것은 물에 빠진 사람이 보따리를 찾아내라는
꼴이었다"

실제로 기아그룹은 5월 이후 7월15일까지 여러차례에 걸쳐 은행권으로부터
합계 3천6백억원의 협조융자를 받았다.

기아에 대한 극비 협조융자가 있었다는 것은 지금까지도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그러나 믿빠진 독에 물붓기가 돼가고 있었다.

김선홍 기아회장은 종금사들의 자금회수가 본격화 했던 6월23일 강경식
부총리를 방문했다.

김회장은 7월13일께엔 청와대로 김인호 수석을 극비리에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만남은 없느니만 못했다.

"김회장은 천연덕스럽게도 그동안의 협조융자는 알지도 못한다는 듯이
얼마를 더 주면 부도나지 않는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또(시나리오설 등)
정부와 관계없는 얘기만 했다"고 배석했던 윤실장은 회고했다.

부도가 임박한 7월12일에는 윤증현 실장, 류시열 제일은행장 등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은행회관에서 기아대책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협조융자후 회생" "즉각부도후 3자인수" "화의" "부도유예
협약 적용"안이 상정되었다.

부실기업 해법으로 화의를 검토한 것은 기업이 아니라 정부와 은행이
먼저였다.

부도처리는 청와대가 강력히 반대했다.

재경원 관계자의 증언.

"재경원은 기아의 자력회생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국내자동차 산업의
구조조정도 염두에 둬야 했다. 그러나 부도처리는 김대통령이 완강히 반대
했던 것으로 안다"

청와대 관계자들도 비슷한 증언을 하고 있다.

김인호 수석은 "대통령께서는 기아문제가 정치문제화 할 것을 우려했다.
한보 이후 얼마나 국력을 소진했나. 게다가 기아는 한보보다 덩치가 더욱
컸다"고 증언했다.

결국 5천억원 규모의 초대형 협조융자방안만이 남았다.

그러나 역시 무산되고 말았다.

한 시중은행장은 "모 은행장이 막판에 비토를 놨다. 금액도 컸지만 이
은행장 역시 한보 재판이 된다는 두려움을 가졌던 것같다. 한보가 무엇
이었나. 은행장이 감옥에 가고 제일은행의 담당상무는 자살했다. 부도지경에
있는 회사에 협조융자 잘못하면 업무상 배임이다. 그래서 기아는 결국
막판에 협조융자를 받지 못했다"고 당시 회의 상황을 설명했다.

며칠후인 14일.

무려 4천억원의 기아어음이 돌아왔다.

오후늦게 류시열 행장은 긴장된 목소리로 강부총리와 김선홍회장 두사람
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중에 4천억원을 막지 못하면 내일 부도유예협약에 넣겠다"

기아는 그렇게 부도유예협약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기아노조의 폭발과도 같은 반발이 파도처럼 덥쳐 왔다.

정부의 음모설이 제기되고 강경식 부총리가 삼성자동차 유치를 위해
뛰었다는 전력도 시비에 올랐다.

일부시민들까지 가세해 연일 데모가 반복됐다.

계속되는 김국장의 증언.

"문제는 기아경영진이 노동조합의 볼모가 되어 있어 아무리 재촉해도
자구계획을 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김회장은 경영권 포기각서도 내지 않고
거짓말만 반복했다. 돌이켜 보면 (강제로라도) 3자인수를 조속히 매듭
지었어야 했다"

8월10일께엔 강부총리가 임창열 당시 통상산업부 장관에게 전화를 했다.

"기아사람들이 나더러 삼성을 위해 뛴다고 하니 임장관이 나서서 중재를
좀 해달라"는 부탁이었다(강부총리 측근인사 증언).

13일 임장관 서상목 신한국당의원 김선홍 3인이 시내모처에서 심야 비밀
접촉을 가졌다.

"김회장이 사표를 내되 수리하지는 않는다"

"기아자동차의 3자인수에 반대한다"

"김회장 주도로 경영정상화를 꾀한다"는데 합의했다.

이 합의안을 들고 이회창 당시 신한국당 대통령후보는 14일 개선장군처럼
기아의 소하리 공장을 방문했다.

병역시비로부터의 탈출이기도 했다.

그러나 15일 자정까지 계속된 기아그룹 사장단 회의는 놀랍게도 사표
문제를 없던 일로 해버렸다.

김선홍씨 역시 다음날 "사표를 낸다고 한 적이 없다. 임장관을 만난 적도
없다"고 선언하고는 김포공항을 빠져 나갔다.

"아마 그사람들은 유력한 대통령 후보의 방문으로 게임이 유리해졌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라고 윤실장은 당시를 회고했다.

강부총리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여기서 원칙을 버리면 정부 권위가 무너진다. 시장경제 원칙대로 기업이
부도가 나면 경영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버텼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었다.

갈수록 해법은 꼬여갔다.

모두가 외환위기의 폭풍앞에서 먼저 총알이 발사되면 죽고마는 러시안
룰렛 게임을 계속한 형국이었다.

해외시장에서 한국물들은 곤두박질쳤다.

달이 바뀌어 9월1일자 한국경제신문은 "외환위기가 가시화하고 있다"는
기획기사를 1면톱으로 올렸다.

9월이 들면서 은행들의 해외 차입라인은 눈에띠게 끊겨 나갔다.

기아문제를 더는 끌수 없게 됐다.

14일부터 17일까지 마라톤회의가 다시 열렸다.

추석기간중이었다.

임창열 장관 김영태 산업은행장 류시열 제일은행장 기아의 박제혁, 송병남
사장이 시내 모처에서 다시 극비리에 만났다.

양측은 <>아시아자동차는 대우에 인수시키고 <>기아특수강은 대우 현대가
공동경영하며 <>협약종료후 기아에 대한 채권행사를 유보하고 <>경영진
사표와 노조동의서를 내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며칠뒤인 21일 기아는 돌연 법원에 화의를 신청했다.

"그들은 김&장 법무법인과 2주일 이상에 걸쳐 치밀한 준비를 했다. 그들은
정부와 협상을 하는척 하면서 호텔방까지 잡아놓고 화의신청 작업을 했다.
정부의 뒤통수를 때린 것이다"고 최근 기자를 만난 김인호 경제수석은 회고
했다.

분개한 채권은행단은 법정관리를 최후통첩했고 10월21일 밤엔 김대통령이
관계장관 대책 회의를 비상소집했다.

안기부 노동부 검찰등 관계기관은 토론을 거듭한 끝에 산은출자를 전제로
법정관리하는 방안을 선택했다.

검찰은 김선홍 회장에 대한 비리혐의 내사 사실을 한국경제신문을 통해
공개해 놓은 터였다.

22일 김선홍 회장은 1백일 동안 내걸었던 투쟁의 깃발을 내리고 사표를
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상처는 너무도 깊었다.

김회장이 사표를 낸 바로 다음날 홍콩 증시는 대폭락으로 치달아갔다.

운명이었다.

한국의 외환대란도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정규재.조일훈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8년 2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