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로 몸살을 앓고 있는 아시아국가들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일까.

대부분 전문가들은 상황을 더이상 악화시키지 않고 위기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기 위해선 견실한 채권시장육성을 최우선으로 꼽았다.

최근 아시아국가들사이에 유러본드같은 아시아본드창설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파이낸셜 타임스지는 최근호에서 아시아의 금융위기가 흔히 알려진 것처럼
통화의 지나친 고평가, 심각한 경상적자누적 때문이라기보다 오히려 효율적인
채권시장의 부재에서 비롯됐다며 이같이 지적했다.

채권시장의 부실로 인해 그동안 아시아기업들은 자금조달을 위해 지나칠
정도로 은행에만 의존해왔다.

그러나 은행들은 알맹이 없는 기형적인 외형성장으로 최근들어 줄줄이
쓰러지면서 결국 금융위기를 부추긴 일등공신역할을 톡톡히 해냈다는 것.

스티즌 클라에센스 세계은행 동아시아.태평양지역담당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만약 이 지역에 견실한 채권시장이 존재하고 은행에만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금융시장의 균형잡힌 발전이 유도됐다면 금융위기충격이 이 정도로
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렇다고 아시아지역에 채권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홍콩.상하이뱅크의 최근 자료(94년기준)에 따르면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지역의 자국통화표시 채권발행규모는 4천4백40억달러에 이른다.

여기에 각국 공공기관이 발행하는 외화표시채권시장도 2천억달러수준.

규모로만 봤을 때 괜찮은 수준이다.

문제는 그러나 채권시장이 기업들의 장기적인 자금조달창구로서 활성화
되지 못했다는데 있다.

무엇보다 은행보다 높은 금리가 활성화의 주된 걸림돌.

금융코스트를 줄여야 하는 기업들로서는 채권시장보다 은행에 먼저 손을
벌려왔다.

기업들의 채권시장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활성화를 가로막아왔다.

대부분 기업들은 장기채발행을 통한 자금조달에 커다란 부담을 느껴온
터다.

이들에게 채권발행은 마지막 수단처럼 인식되고 있다.

국채시장도 마찬가지다.

아시아 각국 정부는 그동안 재정흑자를 유지해왔으며 따라서 굳이 채권
발행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채권시장이 은행과 함께 기업들의 장기 자금조달원으로 균형 발전하기
위해선 풀어야 할 난제가 많다.

먼저 독자적인 수익률곡선을 만들어내야 한다.

회사채가 벤치마킹할 수 있는 채권수익률의 기준이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는 얘기다.

미 정부 발행의 30년짜리 국채는 그 좋은 예다.

다음으로 신뢰성있는 신용평가도 뒤따라야 한다.

일본을 제외하곤 아시아시장에는 이렇다할 신용평가기관이 없다.

일본기관의 신용평가도 현재 제역할을 못하고 있는 상태다.

이같은 난제가 원만히 해결된다면 아시아의 채권시장 활성화는 시간문제다.

성장을 위한 필요조건을 갖추고 있어서다.

현재 기업구조조정, 인프라투자 등으로 이 지역의 자금수요는 막대하다.

세계은행은 94~2004년까지 인프라구축에 소요되는 자금이 8조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측했다.

이는 은행에만 의존하기에는 벅찬 규모다.

따라서 채권시장을 통한 자금조달이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최근의 금융위기를 위기로만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앙드레 리 홍콩
페레그린증권사 상무의 주장은 그래서 더욱 일리가 있다.

이번 사태가 아시아 각국들로 하여금 채권시장의 필요성을 절감케 했으며
행정 지원을 아껴서는 안된다는 위기감을 일깨워준 좋은 기회였다는게 그
주장의 배경이다.

< 김수찬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