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치그룹의 도미니코 데 졸레(53) 사장겸 최고경영자의 세계일주가
다음달로 임박했기 때문이다.
연말 휴가를 위한 유람여행은 물론 아니다.
이른바 "터미네이터 투어".
전 세계에 퍼져있는 구치매장을 직접 돌며 기준에 미달하는 곳의 셔터를
내리는 게 목적이다.
최근 몇년사이에 그는 홍콩 공항면세점, 런던 해로즈 백화점, 대만의
구치 부티크 등에 대해 가차없이 계약종결을 선언했다.
"구치정신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는 냉정한 한마디와 함께.
구치 부티크들이 일제히 매장에 대한 특별점검을 서두르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
이탈리아가 낳은 패션명가 구치는 1920년대 설립된 후 최고급 가죽제품과
액세서리를 내세워 세계 패션산업의 선두주자로 발돋움했다.
구치만의 감각적인 디자인과 흉내낼 수 없는 품질은 지구촌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하나에 1천5백달러짜리 핸드백등 고가의 제품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탄탄히 다져진 초일류 브랜드의 명성은 그러나 지난80년대후반 집안싸움이
불거지면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재산다툼으로 촉발된 가족간 불화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고 경영은
아예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헤쳐갈 임무를 맡은 이가 바로 데 졸레 사장이었다.
구치의 지분일부를 보유하고 있던 바레인의 투자회사 인베스트코프가
파산직전의 구치를 사들이면서 그를 사령탑에 앉힌 것.
미국 하버드대 출신의 변호사이자 20년동안 구치의 법률고문을 맡았던
데 졸레 사장은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르자마자 회사에 가죽제품을 납품하던
장인들을 찾아나섰다.
구치를 위해 다시한번 "작품"을 만들어 줄 것을 간청하기 위해서다.
데 졸레 사장은 이들에게 체불대금과 함께 앞으로의 원가상승분 일부까지
얹어 한꺼번에 지급하겠다고 다짐했다.
창사이래 전례가 없던 인센티브다.
여기에 헌신적이고 뛰어난 파트너에 대해서는 공장 현대화를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덧붙였다.
대신 눈에 보이는 품질혁신을 요구했다.
품질로 쌓은 명성은 품질로 되찾아야 한다는 일념이었다.
본사직원들에게도 실적에 따른 보너스를 지급하는등 미국식 경영으로
새바람을 불어넣었다.
동시에 전세계 구치 부티크를 대상으로 철저한 이미지 통일 작업을
벌여나갔다.
회사기강이 느슨해진 탓에 가는곳마다 매장 분위기며 디스플레이가
제각각이었기 때문.
최고급 브랜드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회사 이미지에 걸맞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매장을 과감히 잘라냈다.
온갖 미디어를 총동원하는 등 광고공세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도발적이고 관능미가 넘치는 구치광고는 금세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가파른 매출상승을 이끌어냈다.
취임 일성으로 "품질지상주의"를 내걸었던 데 졸레 사장의 의지는 서서히
빛을 발하고 있다.
매출은 다시 급상승하고 경영도 정상궤도로 돌아왔다.
사운을 걸고 매달린 의류사업은 패션계의 격찬을 받으며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다.
지난해 매출신장률이 1백%를 웃돈데 이어 올해엔 매출액 10억달러 돌파를
바라보고 있다.
순익도 지난 2년사이 2배이상 늘어난 1억6천8백만달러에 달할 전망이다.
95년 상장당시 22달러이던 주가는 최근 80달러선까지 올라섰다.
물론 구치의 부활행진에 걸림돌이 전혀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엔화약세에 따른 일본시장및 아시아지역의 판매부진으로 최근 매출증가세가
주춤해졌다.
이에 주가도 덩달아 휘청거렸다.
하지만 데 졸레 사장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최근 미국 포브스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올해 매출성장률이 1백%가
안된다고 야단들이라니 너무들 하지 않느냐"며 반문했다.
일시적인 경기후퇴에 불과할뿐 구조적으로 구치의 경영상태는 매우
건강하다는 얘기다.
<김혜수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