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부가 마침내 IMF(국제통화기금)로부터 긴급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금융체제의 전면 개방등을 골자로 하는 "합의 각서"를 채택했다.

말이 좋아 "합의 각서"지 "경제 패전국"이 IMF라는 "점령군"에게 항복문서
를 내준 것이라는 자조가 국내외 한국인들 사이에 높아가고 있다.

항복의 대가는 조만간 처참하게 나타날 것이 분명하다.

정부는 내년도 경제성장률이 2.5%대로 낮아진 뒤 99년에는 5%대의 회복세로
돌아설 것이라지만 그걸 곧이 곧대로 믿는 전문가들은 거의 없다.

당장 부실 금융기관과 일부 한계 기업들의 추가 정리가 현실로 다가오는
가운데 적어도 내년중 4~5%의 마이너스 성장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는게
뉴욕 이코노미스트들의 진단이다.

사정이 이렇게 된게 도대체 누구 탓이냐를 따지기에는 당장 수습해 나가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최소한의 사태발생 원인과 책임소재를 가리는 일은 "앞으로"를
밝히기 위해 필요하다.

그 원인과 1차적 책임소재는 길게 말할것도 없이 시장 메커니즘을 외면하고
작위적이고 편의적인 금융관행을 온존시켜 온 정책당국에 있음을 부인키
어렵다.

한국의 금융시장을 지켜보는 걸 "업"으로 하고 있는 뉴욕의 한국물
펀드매니저들 사이에서는 "한국의 금융-외환시장이 고꾸라지기 시작한 것은
한국의 정부조직 개편에 따라 거대조직 재정경제원이 출범한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며 "이번 한국의 외환위기는 시장실패가 아니라 명백한 정책실패에
기인한 것"이라는 일침을 가하고 있다.

책임소재를 갖고 더이상의 애꿎은 추궁이나 변명은 접어두자.

다만 한 세기전 한국이 "개방"이라는 시대적 조류를 외면하다가 나라
자체를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말았던 역사를 뼈아프게 반추해 보자.

당시 일본은 총포를 앞세운 서방의 요구에 개항으로 대응함으로써 오늘의
경제적 풍요에 대한 텃밭을 일굴 수 있었다.

일본은 또 그후 2차대전을 일으켰다가 패한 뒤 "점령군" 미군이 강요한대로
군대 폐지 등을 골자로 하는 "평화헌법"을 군말없이 받아들였고, 절치부심
끝에 세계 정상의 경제력을 일궈 냈다.

역사는 같은 실수의 반복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를 망친 1차적인 "적"은 내부에 도사리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 환부를 도려내는 각고가 있을때만이 올 겨울을 정말이지 을씨년스럽게
보낼 수밖에 없는 시민들의 고통이 진정한 보상을 얻을 수 있을 게다.

이학영 < 뉴욕 특파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