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헌재(헌법재판소)는 기업부도시 근로자의 퇴직금을 우선적으로
변제하도록 규정한 근로기준법 제37조 2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었다.

헌재의 이번 결정이 내려지기 이전까지 법원은 그 사회보장적 성격을
이유로 퇴직금을 절대적으로 보호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으로 헌재가 선의의 채권자가 희생되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표명한 셈이다.

이로 인하여 기업의 입장에서는 자산의 담보가치가 높아져 보다 많은
자금을 대출받을수 있게 되고 금융기관 역시 기업 부도시 채권회수 비율을
그만큼 높일수 있어 불만이 있을리 없다.

그러나 최근 조기퇴직이다, 부도위기다 하여 고용불안정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근로자들에게는 또 하나의 실질적 심리적 부담이 아닐수 없어
노사관계의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비록 헌재의 이러한 결정이 여러가지 파장을 일으키고는 있으나,
결정자체는 마땅히 존중되어야 하며 더이상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이 시점에서 근로자의 퇴직금을 보장해 줄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찾는 것이 시급한 과제인 것이다.

이미 각계에서 우선 변제대상 퇴직금의 범위설정, 퇴직금 중간정산제도의
활성화, 종업원 퇴직보험제도의 개선 등 갖가지 보호장치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어 조만간 설득력있는 대안이 제시되리라고 기대해본다.

이에 필자도 각계의 이러한 노력에 보탬이 되고자 그 대안의 하나로
기업연금제도의 활성화를 거론하고자 한다.

기업연금제도란 기업이 퇴직금을 금융기관 등 사외에 유보함으로써
퇴직자가 퇴직금을 안정적으로 받을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 만약 기업이
부도를 냈을경우 퇴직금 우선변제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매우 유용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국가들은 국민연금제도, 개인연금제도와 함께 기업연금
제도를 채택하여 3중으로 국민의 노후생활을 보장해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필요성을 인식하여 지난 96년 근로기준법 개정시
이 제도를 도입, 오는 98년부터 허용키로 함으로써 근로자 노후생활보장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새로 개정된 근로기준법이 기업연금제도를 수용할수 있는
금융상품으로 보험만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우선 기업연금을 여러 금융기관에서 허용하여 치열한 경쟁을 유도해내
근로자들의 이익을 위해야 하지만,굳이 보험회사에만 이를 허용한
것은 경쟁제한적이다.

물론 기업연금이 보험회사만이 취급할수 있는 성격의 상품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선진국의 경우 퇴직후 일정한 연금지급을 약속하는 확정급부형
(Defined Benefits Plan)보다, 근로자 개인별 계좌로 관리하면서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확정갹출형(Defined Contribution Plan)의 비율이 더 높다.

확정갹출형은 보험의 성격보다는 고수익을 지향하는 투자신탁의 성격이
더 강하다.

그러므로 기업연금을 보험사만 취급할수 있다는 주장은 근로자의 이익을
도모하기 보다는 경쟁제한적 영역다툼의 성격이 강하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기업연금시장은 고용구조의 변화뿐만 아니라 기업경영에도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기업연금이라는 장기성 투자자금을 토대로 금융기관들의 운용능력이
진정으로 차별화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기관투자가들은 연금자산으로 기업경영을 감시할수 있게 될 것이다.

기관투자가들이 기업경영자의 능력을 평가하여 장기적으로 투자하게
된다면, 기업의 구조개선을 촉진시키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또한 근로자들로 하여금 합리적인 투자성향을 가지도록 인식을
제고하는 효과도 얻게 될 것으로 보인다.

연금의 재원고갈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으로 위험을 부담하여
장기적인 고성과를 달성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게 되기 때문이다.

기업연금은 노사 합의하에 투자하는 것이므로, 근로자들의 선진화된
투자의식은 증권시장의 수준제고에 큰 역할을 하게될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는 이미 개인연금제도의 시행에서 각자의 필요성에 따라 개인연금보험
이나 개인연금신탁 중에서 선택하는 것을 경험한바 있고, 이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각 금융기관의 경쟁으로 실제로 높은 수익률을
누리고 있다.

기업연금제도 역시 기업연금보험과 기업연금신탁을 동시에 허용하는
것이 가능하며 실제로 미국 일본 영국 등 선진국에서는 60% 이상이
기업연금신탁으로 편입되어 있다.

다양한 기업연금상품을 허용하는 것은 근로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노후계획이나 필요성에 맞는 선택의 기회를 준다.

또 금융기관간 경쟁을 유도하여 높은 수익률을 기대할수 있어 궁극적으로
근로자의 복지증진에 기여하게 된다.

최근에 추진되고 있는 금융기관간 업무영역의 철폐와 규제완화 시책에도
부합될 것이다.

정부당국은 이러한 자유경쟁체제하에서 다만 기업연금의 사회보장성이
침해되지 않고 안정적으로 운용될수 있도록 주식이나 부동산 편입비중을
제한하고 채권의 편입비중을 강화하는 등 필수적 감독기능에 충실하면
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