괌 공항 사고로 드러난 "대한항공"의 모습을 살피노라면, "미국의
월남전 개입은 전차를 타는 것과 같았다"라는 맥조지 번디의 얘기가
생각난다.

월맹의 도발이 여러번 있었는데, 왜 어떤 도발에 갑자기 미국이 공격적으로
반응했느냐는 물음에 대해서,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할 조건이 성숙했으므로,
그 도발을 그냥 넘겼더라도, 미국의 개입을 불러올 사건은 조만간
나왔으리라고 그는 설명했던 것이다.

대한항공은 성수기엔 이용가능한 자원에 비겨 너무 많은 운항을 해왔다.

그래서 야간운항이 많아졌고,이에 따라 항공기 검사와 정비가 다소
소홀히 다뤄졌을지도 모른다.

가장 큰 문제는 인적자원의 부족이었으니,전문적 기술과 오랜 경험을
가진 정비원들과 승무원들은 수요에 맞춰 임시로 고용하기 어렵다.

자연히 정비원들과 승무원들은 성수기엔 과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한항공의 항공기들이 안은 위험은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너무
높았고, 이번 사고의 직접적 원인이 무엇으로 판명되든, 그 항공기들은
"사고라는 전차"를 탈 확률이 높았다고 볼수 있다.

"승무원이든 정비직원이든 이번 사고를 보는 대체적 여론은 "그럴리가
있나"라기보다는 "그렇게 될줄 알았어"하는 분위기다"라는 대한항공
직원의 얘기는 이런 생각을 떠받친다.

그런 사정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최고 경영자에게 있다.

항공사고는 피해가 커도 빈도는 작으므로, 그 위험의 크기를 산출하기
어렵고 그 위험을 기업의 일상적 의사결정들에 제대로 반영하기도 어렵다.

자연히 그런 위험은 최고 경영자만이 낮출수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 위험관리(risk management)는 최고 경영자의
본질적 업무다.

기업활동에서 맞는 갖가지 위험들의 한계치가 같을때, 기업은 위험을
가장 적절하게 관리한다.

기업의 모든 활동들은 최고 경영자의 수준에서 비로소 조화되므로, 최고
경영자만이 갖가지 위험들을 합리적으로 줄일수 있다.

이런 사정은 우리 기업들이 안은 위험의 수준이 무척 높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실제로 대한항공 만이 유별나게 높은 위험을 안고 활동해온 것은 아니다.

큰 기업집단들이 잇따라 도산하는 사태는 이 점을 보여주니, 그들은
모두 공격적으로 사업을 늘리거나 다른 분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큰 위험을
안게 된 것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근년에 도산한 기업집단들이 거의 모두 창업주의 2세가
경영했다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대한항공도 2세가 경영하는 기업이다.

우리 재벌들은 모두 가족이 소유하고 경영하므로, 이 사실은 언뜻
보기보다 중요하다.

어째서 2세 경영자들은 그렇게 큰 위험을 안으면서 공격적으로 경영하는가.

먼저 떠오르는 것은 보호된 환경속에서 컸으므로, 그들이 기업환경과
자신의 능력에 대해 비현실적 견해를 지녔을 가능성이다.

현직 국회의원 아들들의 군복무 면제비율이 평균의 1.8배인데, 20대
재벌총수 아들들의 그것은 5.8배다.

이 사실은 그들이 아주 많이 보호된 환경에서 궂은 일을 모르고 자랐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의 현실감각이 현실적이라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보다 미묘한 까닭은 가족안의 역학이다.

창업주의 아들이란 장점만으로 최고 경영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2세
경영인들에게 큰 심리적 압박을 줄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늘 자신들의 됨됨이를 증명해 보이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물려받은 기업들을 키우기보다는 자신의 손으로 새로운 기업들을
일구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강박관념은 형제가 여럿일 경우 훨씬 클 것이고, 장남 대신 지차가
총수가 되었을 경우엔, 더욱 클 것이다.

자연히 그들은 기업경영에서 정상보다 훨씬 큰 위험도 허용했을 터이다.

현재 경제학이나 경영학은 심리적 개인주의(psychological individualism)
를 따른다.

그래서 개인들의 심리상태를 주어진 조건으로 여긴다.

방법론적으로는 건실한 태도지만, 그것은 기업들에 현실적 도움을 주는데
한계로 작용한다.

특히 우리 사회처럼 가족 안의 역학이 중요한 사회에선.

미국 과학사가 프랭크 설로웨이가 보여준 것처럼, 출생순서가 성격에
미치는 영향은 결정적이다.

자식들 사이의 관계는 그만큼 중요하다.

지차가 장남 대신 기업집단을 상속했을 때, 그가 받는 심리적 압박은 아주
커서 그의 판단과 행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 점을 그려하지 않으면,안팎의 회의적 견해를 무릅쓰면서 일부 대기업이
철강과 자동차에 집요하게 매달려온 사실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제 우리 경제학자들과 경영학자들은 심리학과 사회학의 성과들을
이용하여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사업설명서에 나오는 경제학과 경영학의 개념들만으로는 실직적
가치가 있는 진단도 처방도 나오기 어렵다.

우리 사회는 모든 분야들에서 위험이 높은 사회다.

차 타기가 겁나고 안심하고 먹을 음식이 드문 판이다.

그런 환경에서 기업만이 낮은 위험을 지니기는 어려우므로, 기업이 안은
위험의 수준을 줄이는 일은 힘들고 더딜 것이다.

가족 안의 역학이 2세 재벌총수들의 위험 지각에 어떻게 작용하는가
연구하는 것은 그 어려운 일에 실질적 도움을 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