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는 두 종류의 화가가 있다.

그냥 화가 (Painter)가 있고 스타화가 (Art Star)가 있다.

화가는 도처에 많지만 스타화가의 수는 매우 적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피카소,앤디 워홀은 스타화가의 대표격이다.

장 미셀 바스키아 역시 스타화가의 반열에 선다.

그것도 고작 스물여덟의 나이에 말이다.

바스키아의 위대성은 그가 생전에 스타화가의 명성을 누렸다는데 있다.

고흐나 고갱 이중섭의 명성은 죽은 후에 얻은, 덧없기 한량없는 명성이었다.

누가, 무엇이 그 젊은 청년을 스타로 만들었는가.

답은 간단하다.

이 세상 문화의 총본산인 뉴욕이 그를 스타로 만들었고 뉴욕의 언론이
그에게 피카소의 후예라는 왕관을 씌워줬다.

글쎄, 그렇게 되려고 그랬는지 몰라도 그는 생전에 왕관의 형상을 자신의
상표나 되는 것처럼 수시로 그렸다.

그는 세기말의 시대가 만들어낸 특이한 화가였다.

만일 전쟁말기쯤에 태어났다면 그냥 노숙하며 쓰레기통이나 뒤지는 일개
낙서화가쯤으로 굳어졌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낙서나 단순한 만화풍의 그림으로 뉴욕 현대미술계를 제압해
버렸다.

검은 얼굴의 빛나는 (Radiant) 어린아이가 어른들을 마구 밀쳐낸 꼴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악마의 힘을 빌었기 때문에 반짝 스타가 될수
있었다고 공공연히 말하기도 한다.

일견 유치해 보이는 그의 미술이 한국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을까 했는데
이번에 갤러리현대가 과감하게 바스키아를 모셔왔다.

28세에 요절한 흑인작가 바스키아가 한국에선 그냥 지나쳐지나 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남녀노소가 전시장인 갤러리현대로 꾸역꾸역 몰려 들었다.

백남준의 작품이 뭔가를 전혀 몰라보던 사람들이 일순간 그 가치를 알고
몰려온 것과 비슷하다.

물론 여기에는 갤러리현대가 미술관같은 전시장을 새로 짓고 바스키아에
대한 세미나와 영화시사회를 열고 바스키아가 생전에 못다한 재즈연주회를
마련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뿐이랴. 식음료도 풍성하게 준비하고 바스키아의 손길이 직접 닿은 듯한
티셔츠나 모자 엽서등을 만들어 보급하는 치열한 노력도 한몫 했다.

그러나 바스키아의 예술혼 없이는 이 모든 일이 불가능하리라고
단언할 수 있다.

화랑에 직접 발을 들여놓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거기엔 기저귀 찬 아기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알아볼 수 있는
재미있는 그림들이 펼쳐져 있다.

"현대미술은 도무지 모르겠는데" 하고 지내온 사람도 바스키아의 그림을
보면 최소한 "흠, 꽤 재미있는데" 한마디쯤 하게 마련이다.

이 후덥지근한 날씨에 신이 각별히 부여한 재능의 혼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후련한 일인가.

조영남 < 가수 / 화가 >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