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만 아니었어도 아마 지영웅은 그녀와 결혼했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 그는 이렇게 천하게 사느니 차라리 돈있는 독신녀와 결혼이라도
해서 굴욕적인 사생활을 정리하고 싶어 몸부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열두시 정각에 지코치는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근처의 한식집으로 간다.

그러나 이렇게 김빠진 만남은 그로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경우다.

석달전만 해도 백옥자는 자기 애인중 단연 첫손을 꼽는 상대였다.

그녀는 톡톡 쏘는 지적이고 세련된 매력은 없지만 너무도 그에게 열중한
나머지 거의 자기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던 순정파였다.

특별한 개성은 없지만 순하고 못 생기지 않은 몸매와 얼굴을 가지고 돈의
힘으로 최선을 다 해 모양을 내고 나와서 늘 "부끄러버예"라고 말하는
귀여운 여자였다.

그러나 지금 그는 사교적으로 더할나위 없이 세련되고 부드럽고 우아한
여자 김영신을 만나고 난 후라서 백옥자는 비교될 수조차 없이 촌스럽고
초라한 여자가 되어버렸다.

그는 잔뜩 양미간을 찌푸리고 한식집의 소슬대문으로 들어선다.

조금도 보고싶지 않은 여자를 만나러온 그다.

거짓을 꾸밀줄 모르는 그에게 이런 만남은 정말 힘들고 잘 해내기 어려운
역할이다.

그는 밝고 청결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백사장님을 만나러 오셨지요?"

"네"

그는 시들하게 대답했지만 아주 정중하게 안으로 모셔진다.

알아보기 어려울만큼 백옥자는 살이 쪄서 다른 여자인가 할 정도다.

"저 너무 살이 쪄서 알아보기 어렵지요?"

"네"

그는 솔직하게 말하면서 공연히 나왔다고 속을 내리 쓸고 올려 쓴다.

전에도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는 아니었지만 정말 호박같이 변했다.

"병원에서 정신을 잃고 깨어날 때까지 두달동안 운동부족으로 이렇게
쪄버렸어예"

그녀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도 못 한다.

"다이어트도 하시고 골프도 치고 운동을 많이 해야겠습니다"

그는 사뭇 자기가 스승이나 된 듯이 말한다.

"그렇지요.

공연히 만났나부다.

단식원에 갔다 와서 만날걸"

"아닙니다.

백사장님, 저는 그동안 바람 맞은줄 알고요 다른 여자와 사귀었어요.

그리고 곧 결혼합니다"

그는 시치미 뚝 떼고 거짓말을 한다.

한번에 떼어버리고 싶은 혹같아 보여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