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대들에게 종로는 기다림의 거리이다.

즐비하게 늘어선 영화관과 대형서점, 외국어학원들이 이곳만의 독특한
"기다림의 문화"를 만들어 낸다.

종로에는 영화의 본산이라 일컬어지는 단성사에서부터 예술영화를 지향하는
코아아트홀까지 크고 작은 영화관이 수십개나 된다.

하지만 예매없이는 영화감상이 어렵다.

이런 까닭에 종로의 영화관들 앞은 늘 표를 끊어놓고 친구나 애인을
기다리는 젊은이들로 북적댄다.

그러다보니 영화시작을 몇분 남겨두고 초조한 표정으로 애궂은 표만 구기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마련.

외계인을 다룬 코믹물 "맨 인 블랙"을 상영하고 있는 단성사 앞.

오후 늦은 시간 만난 최선경(21.여)씨는 "설마하고 예매를 하지 않았다가
마지막회 표밖에 구하지 못했다"며 "서점에 가서 남는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말했다.

최씨처럼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종각 주변의 대형서점들은
매일 사람들이 넘쳐난다.

정처 없이 이책저책 옮겨다니는 이들은 십중팔구 애인을 기다리거나 시간을
죽이는 사람들이다.

해가 떨어지면서 더위가 한걸음 물러나자 어디선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대로변은 물론이고 분식점들이 늘어서 있어 먹자골목으로 불리는 쪽도
조금만 한눈을 팔다간 다른 사람들과 부딪칠 정도이다.

시간이 조금 더 밤 9시 무렵.

마지막 강의가 끝난 외국어학원에서 젊은이들이 물밀듯 쏟아져 나온다.

이들 가운데는 젊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김밥 한줄, 햄버거 하나로 허기를 메우며 친구나 애인을 기다렸던 이들의
눈빛이 빛난다.

이들이 걸칠 곳을 찾는 동안 종로는 손을 맞잡거나 팔짱을 낀 남녀들 천지가
된다.

종로가 다른 젊은이들의 거리에 비해 눈치 안보고 앉아있을수 있는 찻집이나
패스트푸드점이 많은 것도 기다림의 거리라는 특징 때문이다.

밤 10시.

종로는 더욱 활기를 띤다.

서점은 벌써 문을 닫았고 학원 강의도 끝났다.

영화도 마지막 프로가 상영중이다.

바야흐로 친구와 수다를 떠는 것 외에는 달리 할일이 없는 시간이 됐다.

이른바 "끝내주는 곳"이 드물기에 종로는 쾌락을 찾는 신세대들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인 곳이 못된다.

가볍게 스낵을 안주삼아 카프리나 밀러, 버드와이저를 마실수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물론 포켓볼을 칠만한 당구장이나 좁은 골목안으로 학사주점들도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주류는 아니다.

이제는 5백원짜리 음식은 거의 없는 오백냥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는
한 분식점 주인은 ""해커"를 비롯 몇몇 나이트 클럽이 들어서고 나서야
종로에서도 헤드폰을 꽂은 "삐끼"들을 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신촌이나 강남과 달리 "삐끼"가 드문 것도 종로의 특징이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이번엔 길 양쪽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로 가득찬다.

종각과 종로3가 지하철 역으로도 막차를 기대하는 이들이 잰걸음으로
몰려간다.

서울대앞 녹두거리나 이태원처럼 밤새도록 문닫고 영업하는 곳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 글 김용준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