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웅은 정말 이 철없는 아가씨가 귀찮다.

그러나 그도 집에 돌아가 봐야 텔레비전이나 보다가 자는 것 밖에는
할 일이 없다.

그는 아직 기운이 남아 돌아간다.

"오빠는 내가 귀찮지요?"

"그래. 나는 지금 굉장히 피곤하거든. 오늘은 애인도 오지 말라고 했어.
너무 운동을 많이 해서 몸이 파김치처럼 흐느적거리니까 사우나나 하고
자고 싶을 뿐이야"

"오빠는 왜 나를 그렇게 피해요? 내가 오빠에게 사랑을 해달라는 것도
아닌데"

"그럼 왜 나를 자꾸 따라다니냐?"

"그건 저, 나는 오빠를 한번 그리고 싶어서예요.

원반을 던지는 남자나 생각하는 사람처럼 포즈를 취해주시면 해서예요"

그녀는 임기응변으로 지껄인다.

약간 흥분상태다.

"얘, 그건 대학에 가고 나서 하는 데생이지 지금 재수생 주제에 무슨
모델까지 쓰면서 그림을 그리냐?

너희 집이 얼마나 부자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나같은 모델을 쓰려면
한시간에 백만원은 줘야 될걸.

나는 유명 탤런트 이상이라구. 히히히"

"오빠, 백만원을 내면 정말 모델 서줄 수 있어?"

그는 빙글빙글 웃는다.

열여덟살때 어느 미대 교수가 따라다니면서 모델을 서달래서 서준 적이
있다.

한시간에 4만원을 받고 서주었는데 미대생 열명이 더치페이로 모델료를
지불해주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처럼 돈이 궁하지도 않고 또 그 모델이라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 그는 세상에 나서 최고로 아름다운 미대생을 알게 되었고
그녀와 연애도 하고 눈물의 이별도 했다.

잘 생긴 것도 죄인가? 확실히 그의 경우는 죄가 된다.

여하튼 그는 지금 이 호기심 많은 미아가 자기에게 사랑을 호소하는
그 눈동자의 애절함을 물속처럼 들여다보면서 어떻게 해서 이 소녀기를
갓 벗어난 처녀 아이를 떼어버릴까 연구에 연구를 짜낸다.

"모델 한번만 서주면 다시는 내 주위를 맴돌지 않을 자신 있어?"

"네. 아무리 비싼 모델료를 지불하더라도 나는 임영 오빠의 원반을
던지는 사나이를 그리고 말 거야"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미아는 영악하고 끈덕지다.

"학생이 무슨 돈이 있어? 누드 모델은 아니지만 그렇게 비싼 데생을
할 정도로 대단한 재주꾼인가? 미아는 아직 남자경험이 없지?"

"네. 부끄럽게도 아직 버진랜드야. 한번 남자를 경험하고 싶지만
어머니하고 약속을 했어요.

대학에 가거든 애인을 만들기로요"

그러면서 그녀는 아주 매혹적으로 웃는다.

옛날에 사귀던 미대생이 저렇게 청초하게 웃었었다.

이런 미소는 김영신도 보일 수 없는 그런 미소다.

그것은 그가 좋아하는 향기로운 흰장미의 깨끗하고 싱그러운 미소다.

남자를 모르는 여자의 풋풋한 미소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