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현씨의 소설 "아버지"(문이당 간)는 지난 10여년동안 나온 한권짜리
단행본중 가장 많이 팔린 책으로 기록됐다.

지난해 7월 출간된 뒤 1년동안 총 1백60만권이 판매됐다.

3백만~4백만권의 판매량을 자랑하는 "태백산맥" "동의보감"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 책들은 2권이상으로 이뤄진 만큼
1권의 판매량으로는 "아버지"가 단연 독보적이다.

소설 "아버지"의 성공은 다소 통속적이지만 읽는 사람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감동적인 스토리에 기인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이니 해체주의니 하는 난해한 이론의 소설들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나온 이 작품은 읽기 쉽고 단순하다.

등장인물이 많지 않고 그들간의 갈등도 명확히 드러난다.

세련된 문학적 기교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속에는 90년대중반 아버지들의 모습이 처절하게 형상화돼 있다.

가족을 위해 헌신했음에도 아내와 자식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아버지.

그렇게 지나간 세월을 끝없는 회한과 미련속에 떠올리는 아버지.

그러나 그에겐 절규할 곳도 하소연할 곳도 없다.

34~40대 남성 직장인들은 이 소설에서 자신의 모습,주부와 학생들은
아버지의 참모습을 보았다.

"아버지"의 주인공은 50대 가장 한정수.

지방대 출신으로 뒤늦게 행정고시에 합격한 그는 고지식한데다 연줄이
없어 한직으로만 전전한다.

대학에 다니는 딸과 고교생인 아들,그리고 아내가 그를 둘러싼 환경의
전부다.

한정수 부부는 이미 일심동체가 아니다.

시골 출신에 한물간 팝송이나 통속소설을 즐기는 한정수는 클래식음악
전람회 등 고급문화 지향의 부인 영신에게 자랑거리가 아니다.

자식들은 한술 더 뜬다.

일과 친구들 술자리에 빠져 가정을 소홀히 하는 아버지에 대해 경멸감을
감추지 않는다.

그런 그가 췌장암 선고를 받는다.

그는 자신의 가족에겐 알리지 않은채 혼자만 괴로워하며 더욱 술에
의존한다.

사정을 모르는 가족들은 남편,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더욱 혐오하고,
급기야 딸은 "아버지, 당신은."으로 시작하는 최후 통첩을 띄운다.

애정 표현에 익숙지 않은 아버지 한정수의 딸 사랑은 지극하다 못해
병적이다.

딸이 지망한 서울대영문과 정원이 35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36번 이상의
버스는 타지도 않은 그였다.

가족들은 결국 한정수에게 내려진 사형언도 소식을 알아내지만 그의
선택은 다시 한번 자신의 희생이다.

장기를 기증하고 화장을 부탁한다.

한정수는 아내에게 "아이들을 잘 길러주시오.사람냄새가 나는 사람으로
말이오"라는 유언을 남긴다.

지난해말부터 불어닥친 명예퇴직과 정리해고 등은 "아버지"붐에 채찍질을
가했다.

아버지에게 퇴직이란 한정수가 받은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사회현실과 맞아떨어진 상황 설정이 "아버지"를 밀리언셀러로 만들어준
것이다.

베스트셀러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현실을 반영한다.

"아버지"의 문학적 수준에 대한 회의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상실된 부권과
가족사랑의 회복을 외친 "아버지"의 사회적 의미는 줄어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김상환 서울대교수(철학과)는 소설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이 소설은 아버지 없는 가족사진이라고 할만큼 아버지 부재현상을
잘 그려냈다.

이 소설을 읽고 흘리는 눈물은 아버지를 적대시하던 원죄의식의
표현이자 그에 대한 속죄이다.

이 책의 상업적 성공도 이러한 속죄를 대신하는데 힘입고 있다"

< 박준동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