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목요시평] 인공인간들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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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서양 장기 내기에서 전산 프로그램이 최고수를 이기더니 "로봇
축구대회"가 "한국과학기술원"에서 열려 인공지능과 로봇에 관한 관심이
부쩍 커졌다.
자연적 생식과정을 거치지 않은 "인공인간"은 많은 사람들에게 음산하게
다가오므로 인공인간에 대한 전반적 고찰은 뜻이 있을 것이다.
인공인간에 관한 진지한 논의는 주로 과학소설에서 이루어졌다.
과학소설의 관행에 따르면 인공 인간들로는 인조인간(android), 복제인간
(human clone), 재생인간(doppelganger 또는 zombie), 그리고 로봇을 꼽는다.
인조인간은 화학적으로 만들어진 존재다.
인조인간을 다룬 작품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체코 작가 카렐 차펙의
희곡 "로숨의 만능 로봇들"로 이 작품에서 로봇이란 말이 처음으로 쓰였다.
로봇은 "일" 또는 "강제노동"을 뜻하는 체코어 robota에서 나왔는데 이
작품에선 지금 그말이 뜻하는 것처럼 기계적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영혼이 없고 일밖에 할줄 모르는 존재를 가리킨다.
복제인간은 생물복제(cloning)를 통해 나온 존재다.
생물복제는 어떤 개체를 유전자가 같도록 복사하는 것을 말한다.
얼마전에 양의 복제가 성공했다는 사실이 가리키는 것처럼 복제인간은
실현성이 높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복제가 근본적으로 진화를 거스른다는 점이다.
모든 고등 생물들은 유성 생식을 통해 유전자를 새롭게 결합하면서 진화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점은 재생인간의 경우에 훨씬 뚜렷하다.
이미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일은 그것이 의지를 가진 doppelganger든
의지를 갖지 못한 zombie든, 죽은 개체들이 비워놓은 생물적 공간에 새로운
개체들이 들어선다는 삶의 질서를 거스른다.
그런 인공인간들을 만들 경제적 논리도 생각하기 어렵다.
로봇은 주로 금속을 재료로 삼아 기계적으로 만들어진다.
이미 많은 공장들에서 원시적 로봇들이 힘들고 단순한 일들을 하고 있어서
우리에겐 익숙한 존재지만 과학소설 작가들은 처음엔 로봇에 혐오와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한때는 로봇이 사람에게 적대적인 존재로만 그려졌었다.
그런 사정을 바꾸려고 애쓴 작가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이는 아이적
애시모프다.
로봇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을 없애려고 그는 인류를 로봇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장치로 "로봇의 공학의 세 법칙들(Three Laws of Robotics)"
을 세웠다.
"로봇은 사람들 해치거나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사람이 해를 입도록 해서는
안된다"(제1법칙) : "로봇은 사람이 내린 명령들을 따라야 한다, 그것들이
제1법칙과 상충되지 않는 한"(제2법칙) : "로봇은 자신의 존재를 보호해야
한다, 그런 보호가 제1법칙이나 제2법칙과 상충되지 않는 한"(제3법칙).
뒤에 애시모프는 개인들의 이해가 상충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로봇은
인류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되고 위험을 방치함으로써 인류에게 해가 돌아
가도록 해서는 안된다"라는 원칙을 가장 기본적인 "제0법칙(zeroth law)"
으로 삼았다.
이 법칙들이 나온뒤 거의 모든 작가들은 그것들을 받아들였다.
인공지능의 연구에 업적을 남긴 마빈 민스키는 실제로 그것들을 전산기에
집어넣으려고 애썼다.
아쉽게도 그것들이 자연의 법칙들이 아니고 로봇 제작의 지침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은 흔히 간과된다.
그래서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이 실제로 나오게 되면 잘못 만들어지거나
작동해서 사람을 해치는 로봇이 나올 수도 있다.
모든 기계들이 그러한 것처럼.
따라서 로봇이나 다른 인공인간이 사람을 해칠 수 없다는 주장도 그런
위험들 때문에 인공인간에 대한 연구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도 균형감각을
잃은 견해들이다.
물론 그 두 견해들 가운데 후자가 훨씬 큰 세력을 가졌다.
원래 세상을 비관하는 사람들이 청중을 모으게 마련이다.
이 세상이 그런대로 살만하다거나 내일도 해가 뜨리라는 얘기에 몇사람이나
귀를 기울이겠는가?
그래서 과학소설 영화들에 나오는 인공인간들은 모두 사람들을 위협하는
존재들이다.
자연히 인공인간에 적대적인 견해의 폐해도 그만큼 크다.
그런 견해들에 밴 반과학적 태도는 특히 해롭다.
과학이 낳은 이로운 기술들은 모두 잘못 쓰이거나 사고를 낸다.
그런 사정을 왜곡해서 본질적으로 사소한 사고의 뜻을 과장하는 태도는
비판받아야 한다.
마이클 크라이튼의 작품들이 큰 상업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낮은 평가를
받는 것은 바로 그런 균형감각을 잃은 반과학적 태도 때문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인류는 진화하는 종이란 사실이다.
인류는 원시적 생물로부터 진화해왔고 앞으로도 진화의 과정을 통해
다듬어질 것이다.
그래서 인공인간에 관한 논의에선 진화의 흐름을 따르느냐 거스르느냐
하는 점이 근본적 중요성을 지닌다.
그리고 진화가 사람의 몸에서 다듬어놓은 가장 뚜렷한 특질은 놀랄만큼
발전된 대뇌다.
대뇌의 기능인 지성과 그 지성의 가장 훌륭한 산물인 과학이 자연스러눈
까닭이 바로 거기 있다.
그리고 과학의 부족함을 내세워 과학을 비판하는 태도가 본질적으로
퇴행적인 까닭도.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5일자).
축구대회"가 "한국과학기술원"에서 열려 인공지능과 로봇에 관한 관심이
부쩍 커졌다.
자연적 생식과정을 거치지 않은 "인공인간"은 많은 사람들에게 음산하게
다가오므로 인공인간에 대한 전반적 고찰은 뜻이 있을 것이다.
인공인간에 관한 진지한 논의는 주로 과학소설에서 이루어졌다.
과학소설의 관행에 따르면 인공 인간들로는 인조인간(android), 복제인간
(human clone), 재생인간(doppelganger 또는 zombie), 그리고 로봇을 꼽는다.
인조인간은 화학적으로 만들어진 존재다.
인조인간을 다룬 작품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체코 작가 카렐 차펙의
희곡 "로숨의 만능 로봇들"로 이 작품에서 로봇이란 말이 처음으로 쓰였다.
로봇은 "일" 또는 "강제노동"을 뜻하는 체코어 robota에서 나왔는데 이
작품에선 지금 그말이 뜻하는 것처럼 기계적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영혼이 없고 일밖에 할줄 모르는 존재를 가리킨다.
복제인간은 생물복제(cloning)를 통해 나온 존재다.
생물복제는 어떤 개체를 유전자가 같도록 복사하는 것을 말한다.
얼마전에 양의 복제가 성공했다는 사실이 가리키는 것처럼 복제인간은
실현성이 높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복제가 근본적으로 진화를 거스른다는 점이다.
모든 고등 생물들은 유성 생식을 통해 유전자를 새롭게 결합하면서 진화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점은 재생인간의 경우에 훨씬 뚜렷하다.
이미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일은 그것이 의지를 가진 doppelganger든
의지를 갖지 못한 zombie든, 죽은 개체들이 비워놓은 생물적 공간에 새로운
개체들이 들어선다는 삶의 질서를 거스른다.
그런 인공인간들을 만들 경제적 논리도 생각하기 어렵다.
로봇은 주로 금속을 재료로 삼아 기계적으로 만들어진다.
이미 많은 공장들에서 원시적 로봇들이 힘들고 단순한 일들을 하고 있어서
우리에겐 익숙한 존재지만 과학소설 작가들은 처음엔 로봇에 혐오와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한때는 로봇이 사람에게 적대적인 존재로만 그려졌었다.
그런 사정을 바꾸려고 애쓴 작가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이는 아이적
애시모프다.
로봇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을 없애려고 그는 인류를 로봇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장치로 "로봇의 공학의 세 법칙들(Three Laws of Robotics)"
을 세웠다.
"로봇은 사람들 해치거나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사람이 해를 입도록 해서는
안된다"(제1법칙) : "로봇은 사람이 내린 명령들을 따라야 한다, 그것들이
제1법칙과 상충되지 않는 한"(제2법칙) : "로봇은 자신의 존재를 보호해야
한다, 그런 보호가 제1법칙이나 제2법칙과 상충되지 않는 한"(제3법칙).
뒤에 애시모프는 개인들의 이해가 상충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로봇은
인류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되고 위험을 방치함으로써 인류에게 해가 돌아
가도록 해서는 안된다"라는 원칙을 가장 기본적인 "제0법칙(zeroth law)"
으로 삼았다.
이 법칙들이 나온뒤 거의 모든 작가들은 그것들을 받아들였다.
인공지능의 연구에 업적을 남긴 마빈 민스키는 실제로 그것들을 전산기에
집어넣으려고 애썼다.
아쉽게도 그것들이 자연의 법칙들이 아니고 로봇 제작의 지침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은 흔히 간과된다.
그래서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이 실제로 나오게 되면 잘못 만들어지거나
작동해서 사람을 해치는 로봇이 나올 수도 있다.
모든 기계들이 그러한 것처럼.
따라서 로봇이나 다른 인공인간이 사람을 해칠 수 없다는 주장도 그런
위험들 때문에 인공인간에 대한 연구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도 균형감각을
잃은 견해들이다.
물론 그 두 견해들 가운데 후자가 훨씬 큰 세력을 가졌다.
원래 세상을 비관하는 사람들이 청중을 모으게 마련이다.
이 세상이 그런대로 살만하다거나 내일도 해가 뜨리라는 얘기에 몇사람이나
귀를 기울이겠는가?
그래서 과학소설 영화들에 나오는 인공인간들은 모두 사람들을 위협하는
존재들이다.
자연히 인공인간에 적대적인 견해의 폐해도 그만큼 크다.
그런 견해들에 밴 반과학적 태도는 특히 해롭다.
과학이 낳은 이로운 기술들은 모두 잘못 쓰이거나 사고를 낸다.
그런 사정을 왜곡해서 본질적으로 사소한 사고의 뜻을 과장하는 태도는
비판받아야 한다.
마이클 크라이튼의 작품들이 큰 상업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낮은 평가를
받는 것은 바로 그런 균형감각을 잃은 반과학적 태도 때문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인류는 진화하는 종이란 사실이다.
인류는 원시적 생물로부터 진화해왔고 앞으로도 진화의 과정을 통해
다듬어질 것이다.
그래서 인공인간에 관한 논의에선 진화의 흐름을 따르느냐 거스르느냐
하는 점이 근본적 중요성을 지닌다.
그리고 진화가 사람의 몸에서 다듬어놓은 가장 뚜렷한 특질은 놀랄만큼
발전된 대뇌다.
대뇌의 기능인 지성과 그 지성의 가장 훌륭한 산물인 과학이 자연스러눈
까닭이 바로 거기 있다.
그리고 과학의 부족함을 내세워 과학을 비판하는 태도가 본질적으로
퇴행적인 까닭도.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