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미국 워싱턴의 초여름 햇살은 유난히도 따가웠다.

필자는 당시 14번가를 걷다가 길모퉁이에서 동정을 호소하는 사람과
그 옆에 서 있는 피켓을 보았다.

그 피켓에는 "본인은 한국전 참전용사로서 피츠버그 제철소에서 일하다가
한국산 일본산 수입철강에 밀려 공장이 문을 닫는 바람에 5년간의 실업자
신세 끝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사연이 적혀 있었다.

한 한국전 참전용사의 서글픈 인생유전도 기막히지만 한때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미국 경제의 쇠락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는 생각을
지울수 없었다.

며칠후 그해 7월 3일 밤11시.

뉴욕항 앞의 엘리스 섬에서 자유의 여신상 재건 점화식이 거행되는 모습을
TV로 보게 되었다.

미국이 프랑스로부터 선물로 받은지 꼭 1백년이 되던 그 해, 당시
크라이슬러의 아이아코카 회장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엘리스섬 재단"이
일체의 정부지원 없이 시민들의 성금만으로 균열을 막고 횃불을 교체하여
"제2의 준공식"을 치르는 행사였다.

재건 점화의 의미를 높이기 위해 행사시점을 독립기념일 전야로 택했던
그날 행사에서 레이건 대통령은 자유 여신상의 횃불 재건은 미국의 영광
재건의 상징으로서 이를 위해 온 국민이 단결하자고 호소하였다.

당시 미국 의회는 이미 국산품 애용을 포함한 "미국경제 되살리기" 운동에
불을 댕긴 바 있거니와 그 후 경제계, 근로자, 언론 및 방송과 연예계
모두가 보인 호응은 가히 대단한 것이었다.

미국 의회는 구내식당에서 쓰이던 한국산 금속제 양식기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미국산으로 교체하는 공개행사를 갖는가 하면 언론은 행정부가
각종 행사에서 캘리포니아산 포도주 대신 프랑스산 포도주를 사용하는
행태를 질타하기도 하였다.

업계는 업계대로 미국제품에 성조기 넣기 운동을 벌이는 한편 커크랜드
노조 위원장은 근로자들에게 임금동결을 호소하고 보브 호프는 TV공익광고에
출연하여 "메이드 인 유에스 에이" 애용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근검절약 운동을 미국이 불공정무역
장벽이라고 지적하고 나서고 있는 사실이 실로 아이로니컬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는 현상이었던 것이다.

그후 10년이 지난 오늘의 미국 경제가 어떠한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없으리라 본다.

24년간의 미국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도브린 소련 대사는 미국의 힘의
원천을 한가지만 지적해 달라는 후배 외교관에게 서슴없이 "위기 때마다
성조기 아래 뭉치는 단결력과 애국심"이라고 대답했다 한다.

우리 경제가 요즘 어려운 고비를 맞고 있다.

특히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의 경제 현실에 대한 우려와 비판의 도를 넘어
자조적 퇴영적 패배주의의 그림자가 곳곳에 드리워지고 있는 현상이라고
할 것이다.

최근에 만난 미국 바이어들로부터 "한국은 세계적 일류상품 수출업체를
해외로 내보내고 나서 미국에 무슨 물건을 팔려고 하느냐"라는 충고어린
질문을 접하고 내심 당혹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우리가 지난 30여년간 피땀흘려 노력한 결과 세계 최고의 위치를 확보한
대표 수출상품들이 하루아침에 다른 나라제품으로 둔갑하여 그들의 일류
수출산업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현상을 목도하면서 우리 모두 우리산업
지키기 운동에 나서야겠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높은 가격은 원가절감 노력을 통해 극복할수 있는 여지가 있다지만 국내
생산이 없어서 팔수 있는 물건자체가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기막힌
일이다.

자국내 생산을 끝까지 고집하는 스위스 시계,이탈리아 신발, 독일의
금속산업이 고비용 구조를 극복하고 계속해서 세계 최고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지난 30여년간 두번의 기적을 일구어 냈다.

60년대초 불모지에서 수출기반을 닦은 것이 제1의 기적이라고 한다면
오일 쇼크 이후 장기불황속에서 개도국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고 산업국가로
탈바꿈한 것을 제2의 기적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제2의 기적은 이제 그 한계를 맞이하고 있다.

마침 최근 TV방송 3사가 합동으로 "경제살리기" 특집방송 캠페인을 벌이고
노사가 한마음이 되어 임금동결을 결의하는등 국민 저변으로부터
경제되살리기 운동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지극히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수 없다.

이 운동은 경제전쟁에 임한다는 결연한 각오하에 너나 할것 없이 국민
모두가 함께 나서야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2차대전에 승리할수 있었던 것은 "본토의 전국민이
보내준 수많은 위문 편지가 이루어낸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각계각층의 국민 모두가 단결하여 우리산업 우리시장 지키기에 나서고
경제되살리기 운동에 적극 참여한다면 필자는 이를 "제3의 기적을 향한
횃불이 마침내 타오르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