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언제부터 그렇게 유식해졌니? 그 남자 수염이 많지?"

그래도 자꾸 공박사는 지영웅을 떠올리면서 무엇인가 자꾸 짚이는 데가
있다.

지영웅의 오피스텔은 바로 이 근처에 있고 그는 당구장에도 많이
드나든다고 했다.

또 그는 영어회화를 들으러 다닌다고 했다.

아무래도 미아가 미남이라는 그 오빠는 지영웅인 것 같다.

"엄마, 그 오빠가 언제나 수염을 박박 밀고 다니는지는 몰라도 한번도
그 오빠의 수염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어. 눈에 안 띄는걸. 징그러운
수염 같은건 없어"

그럼 아닌가부다.

지코치의 푸른 수염은 중년여자들에게만 보이는 섹시한 포인트일까?
미아는 엄마가 언제나 긴장을 안 풀고 사는게 불만스럽다.

"엄마, 제발 좀 병원 밖에 나와서는 병원의 원장티 벗고 살아요.

답답해 죽겠어. 엄마가 유명한 정신과 의사라는 것은 자랑스럽지만
보통때는, 우리와 데이트할 때는 아주 평범한 엄마, 느슨한 엄마였으면
더 이상 바랄게 없겠습니다. 모친님"

"알았다. 미안하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의 일이라면 공연히 그렇게
긴장하고 깊이 생각한단다"

"세상이 하도 나쁘니까, 그 후렴은 왜 빼시우? 모친"

미아의 큰 눈에 미소가 가득 번져 있다.

낙천적인 우리 공주님. 공박사는 얼른 여러 걱정스러운 생각에서
놓여난다.

그리고 멍청해져서 미아의 재킷이나 고르기로 한다.

백화점에 들어서니 너무나 숨이 막힌다.

세일때만 되면 모든 자가용들이 카퍼레이드를 하듯이 백화점으로
모여든다.

사람들의 물결이 큰 파도처럼 출렁거리면서 지하에서부터 꼭대기까지
물처럼 차서 출렁거린다.

공박사는 이러한 인파속에 끼는 것이 제일 싫다.

사뭇 염증이 나는 혼잡이다.

"하필이면 이런 북새통에 끼여서 쇼핑을 하냐? 다른 날 오자. 조용히
우리만 와서 극상의 손님대접을 받으면서 사자구"

"꿈 꾸지 마, 엄마. 한국은, 아니 서울은 그런 날이 없을 거래. 자동차가
하루에 450대나 늘고 있고 멋진 디자인의 옷도 값이 조금 저렴하면 우리가
걸쳐보기도 전에 동이 난대요"

"아니다. 요새는 경제적으로 힘든 때야. 금년의 우리 경제가"

그러자 미아가 하하하하 웃어제낀다.

"모친, 꿈 좀 깨세요. 지금 이 백화점안을 봐유. 이 거대한 사람의
파도를 봐. 이것이 어디 신문에서 매일 떠드는 무역적자에 망할 징존가
아닌가?"

"그럼 너는 왜 이런델 하필 오늘 오자구 하니?"

"모친께서 하두 세상물정 모르고 우리에게 긴축 긴축하고 신문과 TV의
베이비처럼 외쳐대니까, 눈좀 씻어주려구. 꿈좀 그만 꾸시고 현실을
보시라구"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