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기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5천년전이었다.

기원전 3천년께 바빌로니아인들이 널빤지에 모래나 분말을 놓아 셈하는
주판을 사용한것이 그 효시였다.

그뒤 중국에서는 기원전 6백년께 틀에 알을 끼운 주판을 개발했는가
하면 고대로마에서는 기원전 3~4세기에 홈을 판 널빤지위에 여러개의 줄을
긋고 조야골을 놓아 셈하는 홈주판을 이용했다.

그러나 서양의 주판은 아라비아숫자의 보급에 따라 점차 쇠퇴하여
17세기에는 그 모습이 사라지고 전산위주의 계산법이 정착했다.

그에따라 한때 주판이 서양에서 중국으로 전래했다는 설이 주장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각기 독자적으로 발명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죽국에서는 후한말의 서악이 쓴 수술기유에 주산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에도 주판을 썼음을 알수 있고 그뒤 15세기중반에
와서야 널리 보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중국의 주판이 한국에 언제 들어왔는지는 알수 없다.

다만 1593년 (선조 26) 정대저의 "산법통종" 출간이 그 전래를 확인시켜
주는 첫 기록이다.

당시에는 일부 식자층에서만 관심을 기울였을뿐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다.

그와 같은 사정은 조선말까지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주산 보급이 본격화된 것은, 1920년 조선주산보급회가 생기면서
부터다.

그뒤 36년 보성전문학교가 첫 주산경기대회를 개최한 이후 잇따라
대회들이 열림으로써 그 보급이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1950년대에 상업학교의 교육과정에 국산과목이 채택된데
이어 60년대부터는 정부에서 검정을 실시했고 일반 학교에서도 국산을
특기교육의 하나로 장려했다.

그에 힘입어 주산을 가르치는 사설학원이 곳곳에 생겨 났다.

주산의 최전성기였다.

그런데 금년 들어 주판이 전자계산기에 밀려 그 모습을 감추어 버릴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국산이 상업학교에서마져도 선택과목으로 명맥만을 유지하게됨에 따라
그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어 주판제작업체들이 모두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국민의 계산기"로 오랜동안 사랑을 받아온 주판이 역사의 뒤안길로
영영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