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한말 러시아 공사로 12년동안 근무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영국 일본
중국 미국 러시아 등 열강간의 치열한 외교전을 주도했던 카를 이바노비치
웨베르.

웨베르는 1885년부터 1897년까지의 서울 주재 기간중 능란한 외교술을
발휘, 영국과 일본을 견제하면서 러시아 세력 확대에 총력을 기울였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대한 삼국간섭 조종, 아관파전 및 친러
내각구성 등이 모두 그의 역할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재임중의 역사적 역할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웨베르에 대해서는
한국과 러시아는 물론 외국 역사학계에서도 거의 연구되지 않았다.

이같은 상황에서 최근 서울대 대학원에서 한국사를 전공한 러시아인
발레리예브나 타티야나(여.39)가 석사논문 "러시아의 조선침략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의 부록으로 소개한 "웨베르 공사의 개인적 배경"에서
웨베르의 전보경위와 고종의 반대, 서울근무에서 막대한 재산취득 등
몇가지 행적을 밝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러시아 외무부가 1895년 7월 "일본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10여년동안 "너무나 적극적으로" 활동한 웨베르 공사를 멕시코
주재 공사로 전보키로 하자 고종은 즉각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공한을 보내 이 결정을 취소해줄 것으로 요청했다.

고종은 이 공한에서 "짐이 간신히 국가를 운영하고 우리 신하들이
온갖 모욕을 당하고 있는 요즈음, 능력있고 정직한 폐하의 정직한 사신
웨베르 공사는 오랜 기간동안 우리에게 조언을 주고 양국 이익에 대한
배려를 항상 해왔다.

웨베르 공사가 교체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짐은 이 소식이 소문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조선이 어려운 상태에 빠져있고 우리양국을 분리시키려는 적드르이
음모를.

고려하여 웨베르가 계속해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도록 분부해주기
바란다"고 웨베르의 계속 근무를 강력히 요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후임인 스페에르가 부임차 서울에 도착했으나
때마침 일본주재 러시아 공사 히트로보가 사망함에 따라 러시아 외무부는
돌연 스페에르를 도쿄 주재로 파견했다.

이 덕택에 웨베르는 1895년말 서울에 계속 근무하라는 활동지침서를
받았으나 멕시코 발령은 취소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후에 새 외무장관 무라비예프는 조선주재 러시아군사교관
문제와 관련해 웨베르가 "너무나 적극적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불만을
갖게 됐고 이에따라 그해 8월 스페에르를 서울에 부임케 했다.

며칠후 서울을 떠난 웨베르는 상해에서 러시아 재무부 고위관리
알렉세예프를 만나게 되는데 알렉세예프는 빗테 재무장관에게 보낸
극비보고서에서 웨베르와의 면담내용을 상세히 보고했다.

이 보고서는 "모든 점으로 보아 웨베르는 본국소환에 동의하지 못하고
있으며 자기가 없으면 조선의 현실이 비참해질 것이라고 몇번이고
반복했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또 웨베르가 고종과 밀착, 매년 막대한 보상을 받았다면서
"조선근무기간동안 약 3만9천5백달러 상당의 집 3채와 토지를 구입했고
최소한 30만달러를 현금으로 가지고 갔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서 내용을 볼때 웨베르는 서울근무에서 엄청난 재산을 모은
것으로 믿어지며 특히 근래 한.러간 소유문제로 외교분쟁을 일으킨 정동
러시아 공관 부지를 이때 사들인 것으로 보여진다.

어쨋든 웨베르는 상트 페테르부르그로 귀환했으나 다음 임지인 멕시코로
부임했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