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구 < 항공우주산업진흥협회 상근부회장 >

지난해에는 불황의 심화와 더불어 일부 기업에서 명예퇴직이나 감원이
성행하는 가운데 이를 소재로 한 TV드라마가 상당수 방영됐다.

이와 관련해 김정현 작 "아버지"가 독서계에 나타난 히트작이라 하여
우연히 읽게 되었다.

기한부 생존의 불치병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한번의 종말이 불가피한게
인생이라면 작중 주인공 한정수와 우리 모두의 운명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최후의 석달을 당한다면 당황하지 않고 조용히 "내가 할 일은 다했다"
고 태연자약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행정고시 출신의 엘리트 서기관인 주인공 정수, 그의 친구인 의사 남박사,
그리고 검사출신의 장변호사.

이들 삼총사중 가장 먼저 저세상에 가야 할 운명을 알고 미처 해보지 못한
짓을 경험하고 싶은 주인공의 심정.

그래서 연애도 해보고 외박도 해보고 근사한 요리집에서 식사도 해보지만
그 모든 것이 생명의 연장과는 아무 상관도 없음을 알았을 때 그 심정을
어떻게 짐작할까.

이런 상태에서 매일밤 술에 취해 들어오는 아버지를 보는 딸의 시선과
아내의 감정은 정녕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침 일찍 집을 나가 밤 늦도록 일하고 돌아오는 이 땅의 많은 봉급쟁이들
의 생활은 살림이나 가족을 제대로 돌볼 여유를 없게 만든다.

이런 생활이 비록 원죄라고 체념하지만 그래도 인간적인 고독을 어찌할 수
없다.

이런 아버지의 고독과 고민이 가족에게 정확하게 투영되지 못할 때 오해가
생기고 갈등이 심화된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가정을 사랑이라는 울타리로 감쌀 수밖에 없다.

말기증상의 환자가 고통을 이겨내기 어려워 안락사를 원하지만 현재의
윤리나 의학은 그것조차 용인하지 않는 문제도 있다.

이 소설은 많은 아버지들에게 후반기 인생의 여러가지를 다시한번 반성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자신의 자화상을 돌아보도록 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