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상파울루에서 리우데자네이루 쪽으로 승용차로 2시간여의 거리에
위치한 타우파테시의 전자복합단지 건설현장.

LG엔지니어링의 김윤기 차장은 이곳에서 건설 총지휘를 하고 있었다.

1만8,000여평 부지에 2층 규모의 모니터공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김차장이 홀홀 단신으로 한반도에서 지구 심장부를 꿰뚫어 들어가면 만날수
있는 남반부에 위치한 이곳 브라질에 온 것은 지난 5월.

비행기도 한번에 갈수 없어 중간에서 쉬어가며 하루 온종일 걸려 왔다.

김차장이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인구 20만명의 타우파테시가 LG전자에 50만평
가량의 땅을 무상으로 주고 LG전자가 이곳에 전자복합단지를 건설하게 됐기
때문.

타우파테시는 전자복합단지가 건설되면 적어도 몇만명의 고용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LG전자에 땅을 준 것.

오래전부터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고 있는 브라질이어서 땅을 외국회사에
무료로 주는 것도 각 지방자치단체의 결정 사항이다.

외국회사에 땅을 줄만큼 광활한 대지를 갖고 있는 나라.

신의 은총을 받은 브라질이라는 나라가 부럽기까지 한 대목이다.

브라질은 국토가 크기 때문에 원시생활을 하고 있는 곳도 있지만 거대한
도시도 같이 공존하고 있다.

첨단기술도 보유하고 있다.

비행기를 만들고 세계 최대의 댐도 있다.

이 때문인지 자존심이 유난히 강한 국민.

브라질에는 단순 시공만 하는 건설업체는 진출할수 없다.

여러가지 진입장벽을 쌓아 이곳에 들어오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LG엔지니어링이 이곳에 진출, 전자복합단지를 건설하게 된 것은
설계 시공 감리를 수행하는 엔지니어링 업체였기 때문.

김차장은 국내에서 50만평에 대한 전자복합단지 전체디자인과 1단계 사업인
연간 40만대 생산능력의 모니터공장 설계를 해가지고 이곳에 왔다.

브라질에 온뒤에 건설하청업체를 구해 공장부지를 정지하고 모니터 공장을
건설하고 있는 것.

이 전자복합단지에는 오는 2000년까지 약 5억달러가 투입돼 컬러브라운관
전자빔 등 전자부품 공장이 들어선다.

김차장이 브라질에서 겪고 있는 가장 큰 어려움은 언어 차이.

브라질은 포르투갈어를 쓰기 때문에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다.

국내에서 포르투갈어를 조금 배우고 왔지만 큰 고생을 했단다.

하청인부에게 지시를 하려고 해도 말을 못해 꽤나 어려웠다는 설명.

하루에 20단어씩 배우고 외우는 노력이 뒤따라야 했다.

여기에 문화 관습의 차이도 두통거리였다.

공장부지 정지시 국내에서는 잡목같은 것을 없애도 별 문제가 되지않는데
이곳에서는 환경단체들이 시비를 걸어왔다.

또 중앙정부 소관인 상하수도 전기 가스설치와 진입도로 건설과 관련해
협조가 잘 이뤄지지 않는 것도 문제점.

건설현장에서도 건설경험이 달라 애를 먹었다.

국내에서는 철근을 넣을때 20~30년의 노하우를 가진 철근십장이 알아서
하는 것이 관례.

그러나 브라질은 철근의 길이 무게 모양 등을 일일이 도면으로 그려줘야
한다.

또 토목기술에 관한한 브라질인들도 기술이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우리식대로 밀어 붙이기가 힘들다.

국내식대로 시공을 이끌어가려니 자기네에게 익숙한 방법을 고집할 때가
있어 마찰이 있다는 것.

브라질인들이 고집이 센 것도 공사 지연을 초래하는 한 요인.

단순한 잘못도 인정하지 않아 전부 다 뜯어고치라고 지시한 적도 있다.

공장설계를 국내에서 한 것도 앞으로는 시정해야 할 사항이라고 김차장은
말했다.

브라질에서는 맞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브라질은 철근구조가 대중화되지 않아 국내처럼 철근제품의 질이
좋지 않다는 것.

반면에 조립식 주택에 쓰이는 프리캐스팅 콘크리트 기술은 우리가 배워야
할 정도로 발달했다.

김차장이 이곳에서 설계를 바꾼 것중 여자화장실을 남자화장실로 대체한
것이 대표적인 케이스.

국내처럼 여자근로자가 많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곳은 남자들을 많이
쓴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어려운 것은 음식이 맞지 않고 외로움을 견디기 힘든 것.

외로움을 달래느라 일과후 호텔에 돌아가면 한손에 담배, 한손에 TV리모컨을
쥐는 습관이 붙었을 정도.

두달전에 김규하 과장이 합세하고 2주전에 허만국 과장과 함승일 대리가
와서 외로움은 어느 정도 달랠수 있게 됐지만 식사문제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김차장은 "밥을 먹고 싶어 쌀을 사다가 묵고 있는 호텔 주방장에게 주고
밥을 해달라고 했더니 주방장이 밥을 해왔는데 그들 방식대로 싱거울까봐
소금을 잔뜩 뿌려놨었다"며 웃었다.

기자가 찾은 날 공사장에서 밥을 지어 함께 먹을때 한 직원이 밥먹기도
힘든 이런 오지에는 다시 오지않겠다고 불만을 털어놨다.

그때 김차장이 심정을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이제 눈물젖은 빵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다"

<글 정용배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