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흥모 <증권예탁원 조사부장>

세계 금융산업은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과거에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커다란 변화의 흐름을 경험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특징적인 현상은 금융거래에서
전자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금융산업의 전자화가 급속히 확산됨에 따라 금융시장에서
거래비용을 줄이고 시장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한 여러 수단이 동원되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금융산업에서 화폐나 증권을 직접 취급하지 않고 전자적인
거래에 의해 거래와 결제를 성립시키려는 시도이다.

이는 증권거래를 포함한 모든 금융거래에서 복합한 증서에 의한 거래를
폐지하고 완전히 증권없는 사회(paperless society)를 구현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같은 증권없는 사회의 구체적인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금융시장에서는
자금결제의 효율화를 위해 지급결제제도의 틀이 전자자금이체시스템(EFTS)
으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으며, 이와 병행해 증권시장에서는 번잡한
증권관리사무의 간소화와 증권거래의 결제를 신속 간편하게 처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증권무권화(dematerialization)제도의 도입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최근 세계 각국에서는 국경없는 24시간 거래시대를 맞이하여 자국
금융시장의 질적 수준과 대외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 저효율.고비용의
금융구조를 과감히 개편해 나가는 것을 정책적인 패러다임으로 설정하고
있다.

요즈음 국내에서도 사회적으로 일반산업부문에서 물류비용이 과다하게
소요돼 국가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이 제기되고 있다.

이것은 국가경제를 지탱해 주고 있는 하부구조의 부족한 처리능력
때문이다.

따라서 실물경제부문에서 하부구조를 구성하고 있는 도로 항만 철도 통신
등의 사회간접시설에 대한 적절한 투자가 선행되어야 사회전체적인 물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듯이 이와 동일하게 금융부문에서도 금융하부구조에
대한 효율적인 정비가 수반되어야만 경제활동을 지탱해주고 있는 전체
금융산업의 효율성과 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증권시장에서도 하부구조기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거래대상인 증권을 없애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비능률적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증권시장에서 증권을 없앤다고 하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증권시장의 거래대상인 증권을 없앤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펄쩍
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러한 현상은 세계 각국에서 실제로 구체화되고 있다.

자본증권에 대한 무권화제도를 최초로 시행한 덴마크에서는 1980년에
증권센타법을 제정, 실물증권과 관련된 법제를 정리하고 1983년에
1차적으로 채권실물을 완전히 폐기한데 이어 1988년에 주식과 기타 증권을
폐기하여 전면적인 무권화 사회를 달성했다.

프랑스에서는 1982년에 증권무권화제도에 대한 법안이 의회를 통과
1988년에 실물증권을 완전히 폐지했다.

영국에서도 1987년부터 무권화제도를 개발추진해 왔으나 시장 참가자들의
이해관계상충으로 인해 실현을 보지 못하다가 영란은행을 중심으로 새로이
개발한 임의적 무권화시스템이 1996년부터 가동중에 있다.

미국에서도 연방증권을 대상으로해 뉴욕연방준비은행(FRB)의 전자자금
이체시스템인 Fed-wire 를 통해 완벽한 무권화제도를 실현하고 있다.

한편 최근에 증권시장의 구조개편을 단행한 말레이시아 중국 등
신흥자본시장국가들도 증권무권화제도를 계획중이거나 이미 시행중에 있다.

이렇게 증권시장에서 실물증서 형태의 증권자체가 발행되지 않고 증권이
자유롭게 거래되는 시장환경이 만들어진다면 국가 전체적으로 자금조달을
위해 증권을 발행하고 관리하는데 소요되는 연간 수천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증권물류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증권회사를 비롯한 증권업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투자가와
증권을 보관관리하는 중앙예탁기관 그리고 명의개서대행기관 등 증권관련
기관의 업무 효율성도 높아질 것이다.

이밖에도 증권무권화 사회가 도래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영향이
나타난다.

첫째 증권시장에서 가시적인 유가증권의 존재가 사라짐으로써 시장
참가자의 위험과 비효율이 제거된다.

증권이 실물증서형태에서 권리개념의 증권으로 바뀌어지게 돼 실물증권을
발행 보관 관리하는 필요성이 제거된다.

또한 증권의 분실과 도난의 위험도 없어진다.

둘째 실물증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증권유통을 컴퓨터에 의한 완전한
전자계좌이체에 의한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증권관리업무가 전산네트워크에 의해 처리되는 시스템을
구비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증권의 매매거래나 결제 및 권리행사가 네트워크화된
전산단말기에 의해 조회 확인 결제가 이루어지게 돼 거래안정성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셋째 증권과 대금의 동시결제를 달성하는 것이 쉬워져 그만큼 증권
시장에서 결제불이행 위험이 줄어든다.

넷째 전자화된 금융지급시스템의 발전과 상응하는 증권없는 무권화시장을
구축할 수 있게 되어 균형잇는 금융시장 전체의 하부구조 발전에 기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나라에서도 증권의 발행부터 유통의 원활화를
지원하는 증시하부구조의 증권예탁결제제도를 선진국 수준으로 정비
개선하는 일이 시급한 실정이다.

증시하부구조의 정비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증권무권화제도를 도입하는
것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아직까지 실물증권의 발행을 강제하고 있는 법률제도를
정비하고 유가증권의 개념을 실물증권개념이 아닌 장부증권이론으로
정립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증권무권화 추진의 핵심인 투자자의 소유지분을 관리할
고도의 전산네트워크의 구축이 수반돼야 한다.

발행회사와 증권회사 그리고 증권거래소 등 시장개설자가 참가하는
고도화된 전산네트워크가 중앙예탁기관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구축돼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