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어머니와 아들사이".

세계굴지의 컴퓨터업체 미 휴렛패커드(HP)에서는 모회사와 자회사간 이런
관계를 맺고 있다.

모.자간 서열은 없다.

장점이 있으면 언제라도 서로 배우는 "활발한 왕복운동"이 HP의 경영
노하우로 자리잡았다.

HP 본사가 직원교육용으로 만든 "품질입문서" 첫장은 일본자회사에 대한
칭송으로 시작된다.

루이스 플렛 HP회장겸 최고경영자(CEO)는 서문 첫머리에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일본HP의 전사적품질관리(TQC)운동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TQC운동 도입에 착수했다".

일본HP가 TQC를 채용한 것은 지난 77년 4월.

당시 소비자들 사이에는 일본HP 제품에 대한 원성이 높았다.

고장이 워낙 잦았던 탓이다.

회사로선 난감했다.

대부분(80%)이 미국 본사에서 수입한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개선을 요구해도 본사에서는 "일본에서만 생기는 문제"라며 나몰라라했다.

그러니 직접 만드는 나머지 20%에 승부를 걸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생각해 낸게 TQC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우선 고장율이 급감했다.

도입 3년뒤인 80년에는 일본자회사의 컴퓨터제품이 HP그룹 전체에서
이익율 톱에 올랐다.

그후 2년만인 82년, 재계의 노벨상이라는 "데밍"상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사사오카 켄조 당시사장(현재 상담역)이 "TQC복음"의 전도사가 된 것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사사오카 전사장은 전세계 HP생산거점을 돌며 TQC운동 성공담을 열심히
전파했다.

냉랭하기만 했던 본사의 반응도 변하기 시작했다.

83년, 드디어 본사가 TQC를 역수입하기 시작했다.

"좋다고 판단되면 무엇이든 열심히 섭취하는 HP의 "개방풍토" 덕분"
(사사오카 전사장)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모회사가 자회사의 장점을 그대로 삼켜버린 것은 아니다.

나름으로곱씹어 잘 소화시켰다.

다시 자회사에 피드백하는 점도 잊지 않는다.

개인의식이 강한 미국에서 TQC가 그대로 적용되는데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미국 입맛에 맞게 TQM(종합적품질경영)으로 요리됐다.

HP가 그룹 전체차원에서 TQM활동을 개시한 것은 지난 87년.

그후 QMS라는 품질 성숙도 평가시스템으로 발전했다.

일본HP도 이 시스템을 도입한 것은 물론이다.

일본에서 시작된 TQC가 전세계를 한바퀴 돌면서 "최신판"으로 개정돼
일본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QMS에서 말하는 "품질"은 제품과 서비스에만 해당되는게 아니다.

업무처리과정에도 "품질"의 개념이 적용됐다.

전화받는 예절등 "고객이 받는 인상"까지 QMS대상이다.

공급자가 제공하는 품질만이 아니라 수요자가 느끼는 질도 관리대상이
된 것이다.

이런 다양한 품질평가를 위해 특별히 훈련된 조사원들이 있다.

바로 "리뷰어"다.

세계 각 거점을 돌며 QMS효과를 진단(리뷰)하는게 이들의 임무다.

그러나 리뷰어의 촛점은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과정"이다.

계획은 어떻게 수립됐나, 전략은 어느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나 등.

실적을 점수로 매겨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시험대"같은 분위기는 전혀
없다.

"어떤 생각으로 전략을 세웠고 경영은 어떻게 꾸려 왔는지가 정리되면서
문제점도 보이기 시작한다"(고타니 카쓰토 일본HP사장).

리뷰는 경영기법을 개선하기 위한 그룹내 토론의 장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리뷰어는 HP그룹전체에 2백명정도 있다.

전세계 거점을 돌다보면 자연히 각 자회사의 살림살이를 시시콜콜 알게
된다.

여기서 들은 본사와 자회사의 성공.실패담을 각지로 돌아다니며 알린다.

일본자회사의 사사오카 전사장이 맡았던 전도사 역할을 이제 리뷰어들이
물려받은 셈이다.

모자간 상호학습이 시스템화 된 결과다.

HP에도 원래 독특한 경영철학이 있다.

"철저한 고객지향정신, 팀워크체제"로 요약되는 "HP주의"가 그것이다.

여기에 "모자간 왕복운동"이란 자극제가 주입되면서 HP주의는 경영시너지
효과를 누리고 있다.

"윗사람"이라는 경직된 권위주의를 깬 덕분이다.

창조와 유연성이 강조되는 21세기 기업생존의 지혜이기도 하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