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자 <화가 / 고려대 교수>

지난 일요일 차창밖으로 차가운 빗방울에 젖은 낙엽을 보며 우리가족은
분당에서 돈암동으로 갔다.

잔잔한 미소에 수줍은듯한 모습으로 20여년전 기억속에 남아있는
청순했던 한 신부의 은경축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신문기자였던 남편과 중학교 미술교사로 그림을 그리던 나는 기자촌에
18평짜리 새집을 마련하여 시골의 시부모님을 모셔왔다.

노인들의 도시생활 적응고 커가는 아이들의 교육및 젊은 우리부부의
삶의 좌표를 위해 종교의 필요성을 느껴 의논끝에 카톨릭을 선택하여
구파발 성당을 찾아갔다.

그때 나보다 한살 아래로 조용한 성품에 겸손한 젊은 신부님은 누구의
인도도 받지않고 스스로 성당문을 두드린 우리 가족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그후 우리가 기자촌을 떠나 그 신부님과 헤어진지 20년이 지났다.

그사이 신부님의 세례를 받았던 시부모님은 돌아가시고 6살박이 큰애는
결혼해서 가장이 되었다.

지난 17일에는 옛날 그 신부님의 사제서품 25주년을 맞는 은경축미사가
돈암성당에서 있었고 우리가족은 감회어린 마음으로 그 미사에 참석했다.

순명 청빈 정결의 사제생활 25년을 기리는 신자들의 정성과 감사와
사랑의 응축으로 마련한 행사가 진행되었다.

하얀 드레스의 천사같은 어린소녀들의 성가와 주님의 평화를 잔잔히
가득안고 다정하게 우리에게 오시는 "부드러운 남자"당신을.의 축시낭송과
영적예물증정, 축사가 이어졌다.

무엇보다 행사 마지막 최창화신부님의 답례사는 그의 신앙철학을 담은
인상적인 내용이었다.

살아가는 동안 성취를 통한 기쁨도 맛보지만 때로는 실패나 좌절로
고통과 슬픔을 맛을 수있다는 것을 알고 기쁘다고 너무 좋아할것도 없고
슬프다고 너무 괴로와 할것도 아니며 항상 "온유와 겸손과 인내"로 살아가야
합니다.

밖에는 싸늘한 가을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지만 최신부님의 은경축을
기리는 조그만 돈암동성당은 따뜻하고 넉넉한 온기가 넘쳐흘렀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