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베어링은행의 돌연한 붕괴와 O-157같은 대장균의 갑작스런 만연.
자연과 사회에는 이처럼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 많다.

불가사의한 현상도 부지기수다.

이런 현상은 "자연과 사회구조는 기본적으로 안정적"이라는 기존 학설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경제 컴퓨터 물리학자등은 그래서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다.

의외의 상품이 시장을 석권하고 잘나가던 기업이 갑자기 쓰러지는 이유들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를 찾았다.

최근 미국 일본의 학자들은 이같은 현상속에서 어떤 공통적인 요인을 발견,
이를 "복합계(Complex System)"라고 부르고 있다.

세계 지식사의 또하나의 대혁명으로 평가되는 "복합계"를 시리즈로 소개
한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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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WERTY..."

이는 영문암호문이 아니다.

어떻게 발음할까 고민해야할 영어단어도 아니다.

타자기나 PC자판기의 알파벳 배열순이다.

알파벳끼리는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다.

세계인들은 그러나 매일 이 순서로 된 자판을 두드린다.

이같은 "배열"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해답은 너무나 "우연"적이다.

타자기가 처음 만들어질때 레민턴이란 타자기제조회사는 자판을 너무 빨리
두드리면 자판이 서로 얽혀 작동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다.

따라서 빨리치지 못하도록 일부러 자판을 어렵게 배열했다.

"ABCDEF..."순이 아닌 "QWERTY..."순으로.

비효율적이지만 일단 이 타자기가 시장에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이 타자법
을 익혔다.

점차 이 배열에 익숙한 사람들이 늘어났다.

다른 타자기 업체들도 "QWERY"순의 자판을 만들수 밖에 없었다.

아주 "우연"하게 만들어진 알파벳 배열이 영구적으로 시장에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우연"이 시장을 지배한 예는 또 있다.

VTR개발초기의 시장쟁탈전이 그렇다.

당시 개발된 VTR녹화방식은 "베타"와 "VHS" 두가지.

세계최대인 일본 소니사가 베타방식을 개발했고 경쟁사인 JVC는 VHS방식
으로 맞섰다.

업계는 기술력이 훨씬 뛰어난 베타방식의 압승을 점쳤다.

그러나 상황은 거꾸로 갔다.

소니를 견제하려는 유럽과 미국전자회사들이 JVC의 손을 들어줬다.

기술발전보다는 시장점유율을 선택한 것이다.

결국 VHS방식이 주도권을 거머줬고 베타방식은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이처럼 "QWERTY"와 "VHS"의 승리는 판도가 굳혀지지않는 불안정한 시장
에서는 다소 우연적인 요소들이 시장을 좌우할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북경의 나비가 날개짓을 하면 그 파장의 연쇄효과로 태평양너머 뉴욕에
태풍이 몰아칠수 있다는 "나비효과"처럼.

이는 거꾸로 말해 시장초기의 불안정성을 잘 활용할 경우 시장을 완전히
석권할 수 있다는 논리이기도하다.

물론 이같은 현상은 기존 "경제논리"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일반적으로 경제논리는 언제나 "균형점으로 돌아가려는 안정적인 힘"
(네가티브 피드백)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경기가 불황으로 떨어지면 반드시 반전하고 상승때는 언젠가 정점에 도달
한뒤 하강한다는 설명이다.

기업의 수익구조를 설명하는 "수확체감의 법칙"도 그중 하나이다.

제품 생산시 노동투입량을 점차 늘리면 노동 1단위당 수익증가분(한계수익)
은 감소한다는 논리다.

그러나 "QWERTY"나 "VHS"의 승리는 기업 수익구조에 반대의 현상이 있음을
보여준다.

"균형으로 돌아가려는 힘" 말고도 "균형에서 멀어지려는 힘"(포지티브
피드백)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불안정한 경제구조에서는 초기시장을 선점한 승자가 전부를 차지하는
"수확체증의 법칙"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과거엔 이런 현상이 우연으로 처리됐다.

그러나 요즘 학자들은 여기서 어떤 공통원리를 찾아내고 있다.

"안정된 시스템이 우연적인 계기로 진화.강화되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상태로 변화된다"는 원리다.

학자들은 이를 "복합계(complex System)"로 표현한다.

하이테크산업은 복합계의 대표적인 장이다.

컴퓨터 전자 통신등 하이테크산업은 매우 불안정하기 때문에 어떤 제품이
초기에 한번 시장을 리드하면 후발제품이 참여할 틈을 주지 않고 시장을
거의 장악한다.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우선 "MS-DOS"를 시장에 뿌리내린뒤 이를
업그레이드시킨 "윈도"로 다시 한번 시장을 석권했다.

윈도즈와 관련된 모든 제품을 내놓으면서 시장을 계속 지배하고 있다.

젊은 빌케이츠회장은 수확체증이라는 복합계원리를 일찌감치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김지희기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