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원 < 미 오리건주정부 주한대표부 대표 >

지금도 태평양 연안 오리건주와 캘리포니아주 경계에는 1970년부터
8년간 오리건주지사를 지낸 톰 맥콜씨에 의해 세워진 안내판이 남아있다.

안내판에 쓰인 글은 "오리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러나 이젠 돌아가십시요"이다.

이는 대부분의 "개발"이 자연을 훼손하고 공해를 유발시킴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며 사는 것보다는, 비록 덜 산업화되더라도 자연과
더불어 살고 싶다는 뜻으로, 오리건사람들이 얼마나 "삶의 질"을
중시하는가를 설명할때 흔히 이용되는 실례다.

그들은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자연환경이 훼손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그 한 예로 최근에 현대전자가 오리건주 유진시에 미화 약 13억달러
(1조원)를 투자해 반도체공장을 건설중이다.

이는 우리나라기업들의 해외투자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일 뿐만 아니라,
오리건주측에서도 외국자본치고는 최대규모의 액수로서, 이를 유치하기
위해 필자와 오리건주정부는 지난 2년여동안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오리건주정부의 입장에서는 세계제일의 첨단 전자단지인 캘리포니아의
실리콘벨리 못지않는 "실리콘포리스트"를 조성하고자, 세계적인
반도체기업 유치에 적극적이었다.

그 결과 1989년 일본의 후지쓰를 시작으로 약 1,600여개의 크고 작은
기업들이 몰리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현대전자에 앞서 지난 7년여동안 삼성전자측에서 오리건주의
포트랜드시 근처에 반도체공장건립을 적극적으로 연구 검토했었다.

사실 현대전자가 유진시에 공장을 세워 가동하게 되면 약 1,000명의
고용효과를 올리게 되니, 주정부나 시당국에서는 갖가지 매력적인 혜택을
제시하며 거의 "모시다"시피 유치노력을 했다.

그러나 문제는 뜻하지 않게도 환경보호단체들의 반대에 봉착하게
되었다.

즉 공장이 들어서면 그곳 늪지에 서식하고 있는 희귀한 동식물이
사라지며, 이 공장에서 나오는 화학용액 및 가스들이 대기 또는 하천을
오염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들은 거대한 반도체 제조공장이 그 지역 생태계의 균형을 좌우하는
늪지를 메꾸게 된다며 "지구가 먼저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항의하며
공사장 불도저에 올라가 작동장치를 잠그는 등 격렬한 반대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필자가 지난 1월 공사현장을 방문했을때만 해도 총기까지 소지한
경비원들이 밤 낮없이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러나 주정부나 시당국은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참여하고 있는 환경단체들이 소수인데다, 마구잡이식
실력시위가 많아 대다수의 현지 주민들조차도 못마땅해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대전자는 법원판결에서 승소해 이제 더이상 법적으로 문제될
사항도 없었고, 현재는 공장건설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공장입지를 반대하고 이들 소수의 주민들과 싸워 이겼다는
자부심보다는, 어떻게든 현지주민들과 선린관계를 맺어야만 하는 현대측의
고민은 아직 남아 있다.

이 사례는 해외에 공장을 건설할땐 반드시 환경문제를 고려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국내 기업들에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지난 92년 7월 하버드대의 케네디행정대학원 지역개발과정을 연수한
오리건주 경제개발성차관인 릭 슐버그씨의 이야기는 실제 관계당국자로서의
환경에 대한 인식과 현명한 대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준다.

오하이오주의 한 페인트회사창고에 불이 났다.

당시 소방서장은 물을 뿌려 불을 끄느냐, 아니면 그냥 타게 두느냐를
긴박한 상황에서 신속한 결정을 해야만 했다.

불을 끄면 120여명에 달하는 종업원들의 직장도 구할 뿐아니라,
약 4,900만달러 상당의 손실도 어느정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창고안에는 약 40만주민의 식수를 공급하는 지하수층이 있어,
물을 뿌리면 페인트의 독성화학물질이 흘러들어가 지하수를 오염시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주민들의 식수를 제공할 다른 길이 없었다.

소방서장은 불을 끄지 않고 끝까지 타게 내버려 두었으며, 매스컴과
주민들은 그의 지혜로운 결정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는 것이다.

최근 여러 지방자치단체들이 열악한 재정을 충당하기위한 목적에서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경쟁적으로 자연을 훼손시키는 것같아 안타깝다.

사실 이 새삼스런 지역개발론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자연환경이 온전한 지역일수록 대체로 낙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찌기 산업화된 지역들처럼 자연환경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그래서 심각한 공해문제 등을 유발시키는 식의 개발이 과연
바람직한가.

이제 우리는 무차별 산업개발방식에서 벗어나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방식이 아니고는 더 높은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이는 곧 "삶의 질"의 향상문제와 직결된다 하겠다.

지난 30~40년동안 생산의 능률성을 최우선으로하고, 생활환경의 중시나
개선은 그 다음으로 여겨온 것은 부끄럽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거창하게 국제적 인조류나 경향은 차치하고라도 이제 우리 일반시민들도
정신적 여유나, 육체적 건강 등을 누릴 수 있는 자연, 생활환경 등의
쾌적함, 즉 삶의 질의 향상이 얼마나 중요한가 절실히 깨닫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개발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개발은 하되 그 지역생태계에 가장 적합한 개발방식을 따르자는
것이다.

그렇게해서 개발과 산업화가 곧 "삶의 질"의 향상이라는 당연한 명제와
부합되어야 될 것이다.

국민소득 1만달러를 넘어서고 이미 OECD가입이 사실상 확정된 지금
명실공히 선진국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 질 높은
교육 등 "삶의 질"을 최우선으로 하는 소프트웨어식 개발에도 성공하여
자손대대로 살기좋은 금수강산이 되기를 기원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