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부인이 습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대부인에게 아뢰자 대부인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잠시 아무말이 없다가 어깨를 들었다 놓으며 길게 함숨을
쉬었다.

"습인이 그애가 참으로 사려깊은 아이구나.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것들까지 염두에 두고 걱정 하다니.

근데 듣고 보니 정말 보통 일이 아니구나.

이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대부인이 희봉과 왕부인을 돌아보았다.

얼굴의 주름살마다 염려가 진득하게 배어 있었다.

희봉이 고개를 숙이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왕부인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한 가지 방도가 있긴 한데 숙모님께서 어떻게 여기실지..."

"무슨 방도인데? 어머님 앞에서 같이 지략을 짜서 의논을 해보자고"

왕부인이 희봉 쪽으로 바투 다가앉았다.

"이건 도둑들이 쓰는 수법이긴 하지만..."

희봉이 얼른 말을 꺼내지 않고 머뭇거렸다.

그러나 왕부인과 대부인은 더욱 안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수법을 쓰든 일이 좋게만 마무리된다면 다행이지"

대부인이 한마디 거들자 희봉이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나서 이제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도둑들이 어떤 사람에게서 보따리나 목걸이 같은 것을 채갈 때 슬쩍
다른 물건을 땅에 떨어뜨려 그 사람의 주의를 그쪽으로 끌고 나서
도둑질을 하잖아요.

그런 식으로 일단 보옥 도련님의 관심을 대옥 아가씨에게로 돌려 놓고
이 혼사를 추진해 나가자 이거지요"

"보옥의 관심을 대옥에게로 돌려 놓다니?

이미 보옥이 대옥에게 이미 기울어져 있다고 해서 우리가 이렇게 걱정을
하는 거잖아"

왕부인이 무슨 말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러니까 보옥 도련님의 혼인 상대가 대옥 아가씨라고 거짓 소문을
내자 이거지요.

그러면 우선 먼저 보옥 도련님의 반응이 있을 거잖아요.

아무리 정신이 오락가락한다지만 소문을 자꾸 듣다 보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치를 채게 될 테니까요"

"보옥의 반응에 따라서 일을 추진하자 이건가요?"

"보옥 도련님의 반응이 어떻든 일은 끝까지 추진해야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만약 보옥 도련님의 반응이 덤덤하다면
우리가 추진하려는 혼사가 쉽게 이루어질 거고, 보옥 도련님이 그 소문을
듣고 무척 기뻐한다면 혼사가 이루어지기까지 좀더 지혜를 짜내어야
한다는 거죠"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