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라고 하면 초중고 시절 미술시간에 배운 풍경화나 정물화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특별히 미술반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크레파스와 수채화물감외에
다른 재료는 거의 사용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국내의 애호가들이 유독 유화를 선호하는 데는 자신이 다뤄보지 못한
재료로 그려졌다는데 대한 일종의 선망이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미술의 경우 장르및 내용파괴와 아울러 재료파괴 현상이
두드러진다.

서양화라고 해서 꼭 캔버스에 오일물감으로 그려지지 않는 것도
물론이다.

요즘은 늦게 마르는 오일물감대신 빨리 마르고 다루기 쉬운 아크릴물감을
사용하는 작가들이 대부분이고, 바탕 역시 캔버스대신 종이나 여러겹으로
만든 한지 혹은 헝겊 나무 합판을 이용하거나 심지어 철판을 쓰는 사람도
있다.

또 같은 화면에 아크릴물감과 먹을 함께 쓰기도 하고 종이나 철판 등
각종 오브제를 곁들이기도 한다.

회화가 갖는 평면성의 단순함과 지리함을 탈피하려는 작가들의 노력이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생산하는 셈이다.

따라서 회화의 경우 요즘은 재료가 작품값에 특별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캔버스에 오일물감으로 그렸다고 해서 종이나 합판에 아크릴물감으로
그린 것보다 비싼 경우는 거의 없다.

작품값을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작품성과 작가의 지명도다.

단 오브제를 곁들인 것은 나중에 하자가 발생할 수도 있으므로 꼼꼼히
챙겨보는 것이 좋다.

이번 주에는 판화와 염색부문의 개척자였던 작고작가 유강렬씨
(1920-1976)의 25호짜리 섬유작품이 1,800만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하다 귀국, 구미화단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는 서양화가 박영남씨의
"창문에 그려본 풍경" (50호)이 900만원, 나무에 혼합재료로 그린
남기호씨의 "무제" (40호)가 300만원에 출품됐다.

고미술부문의 "백자철사청화매화문항아리" (1,500만원)는 지방의
한 수장자가 내놓았다.

< 박성희 문화부장 >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