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다, 나라는 주권을 상실했고 국민은 평등을 잃고 말았다.

진실로 피가 있는 사람으로서야 어찌 참고 견딜 수 있으랴. 아아,
나라는 장차 없어지고 민족은 노예가 되겠구나.

구차스레 살려고 한다면 그 욕됨이 더욱 심할 것이 아닌가.

어찌 태연히 죽기보다 나아질 수 있으랴" 일본의 압력을 받은 영국이
한국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게 되어 공사관을 철수하고 귀국할 신세가 된
32세의 젊은 주영서리공사 이한응은 이런 유서를 가족에게 남기고 런던에서
음독자결했다.

망국의 한을 안고 죽은 첫 순절자였다.

1905년 5월의 일이다.

그로부터 6개월 뒤인 11월에 을사조약이 맺어졌고 뒤이어 1910년에는
한.일합방이 이루어진다.

몸은 이역만리에 있었지만 국제정세와 일본의 속셈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젊은 외교관의 판단은 이처럼 정확했다.

이한응이 예측했던 것처럼 일본의 합방계획은 이미 오래전에 예정돼
있던 일이었다.

1910년 합방실천의 밀명을 받고 한국에 부임해온 육군대신 출신의
데라우치는 먼저 일헌병 2,000여명을 증원시켜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했다.

그리고 황성신문 대한민보 대한매일신보등 신문을 정간시킨뒤 데라우치는
이완용과 함께 합방안을 구미고 그 해 8월22일에 어전회의를 열어 오후
5시에 합방조약에 조인했다.

조약안을 꾸미는데 문제가 됐던 것은 황족과 매국노들의 신분보장에
관한 것 뿐이었다니,망국은 이미 결정돼 있었던 셈이다.

조약은 이미 해결되었으나 국민의 여론을 두려워 했던 일제는 발표를
미루고 먼저 애국단체를 해산시키는 한편 애국지사 수천명을 무단검거하고
원로대신들을 연금시킨 뒤 8월29일에야 순종에게 양국의 조칙을 내리게
했다.

이로써 한국은 조선왕조가 건국된지 27대 519년만에, 그리고 대한
제국이 성립된지 18년만에 망하고 말았다.

오늘은 86번째 맞은 "국치일"이다.

중국은 1915년 중.일간의 치욕적인 21개조의 조약을 조인한 5월9일을
"국치기념일"로 정해 국욕을 당했던 그날을 명심시키고 있는데 한국에는
"국치일"이 사전에만 올라 있을뿐 지금은 국치일을 아는 사람조차 드물다.

젊은이들은 더 그렇다.

먼저 언급한 젊은 외교관 이한응을 필두로 1905년부터 1910년무렵까지
망국의 한을 안고 자결한 순절자는 문헌에 명시된 사람만도 45명에 이른다.

국치일이 이들을 추모하며 국치민욕을 되새기고 "나라"를 사랑하는
기회가 되도록 해야하지 않을까.

박은식의 말처럼 우리의 역사를 이어 온 것은 충렬의 혈기이고 국맥을
지켜온 것은 도를 위하는 혈광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