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릉은 대옥에게서 시를 배울 것을 기대하니 기분이 너무 좋아 얼굴이
활짝 펴졌다.

대옥은 화사한 향릉의 얼굴을 보면서 새삼 어여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아리따운 여자가 개차반 같은 설반의
애첩이라니.

대옥은 향릉이 더욱 안쓰럽게 여겨져 이번 기회에 시를 잘 가르쳐
주어야 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시를 짓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야.

기승전합을 잘 따라가며 맞추기만 하면 되는 거지.

승과 전에서 한쌍의 대귀가 되도록 하고, 평성은 측성에 맞서게 하고,
실자는 허자에, 허자는 실자에 맞서게 하면 되는 거지"

대옥은 술술 시작법의 기초를 쉽게 읊어내려갔지만, 향릉으로서는 뭐가
뭔지 아직은 잘 알 수가 없었다.

"유명하다는 옛시집을 꺼내어 살펴보면 방금 대옥 아가씨가 말한
시작법대로 되어 있는 시도 있는것 같고 그렇지 않은 시도 있는것
같은데 그건 왜 그래요?"

향릉이 평소에 궁금하던 사항을 물어본 셈이었다.

향릉의 질문이 예리하다고 느꼈는지 대옥이 두 눈을 크게 뜨고 향릉의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보고 나서 대답하였다.

"절묘한 글귀가 있을 때는 평성이니 측성이니 허자니 실자니 하는
원칙들을 뛰어넘어버리지.

원칙을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지킬 필요가 없을 정도로 글이
살아 있다는 뜻이지.

그런데 그런 대가들의 기법을 흉내낸답시고 절묘한 글귀도 아닌데
원칙을 저버리는 것은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다가 가랑이가 찢어지는
격이지.

그런 절묘한 글귀는 기발하고 훌륭한 착상에서 나오는 법인데, 착상이
좋고 뜻만 참되면 사실 글을 그렇게 수식하지 않아도 되는 거지.

맹자 선생도 "글귀로 뜻을 흐리게 해서는 안된다 (불이사해의)"고
경계하셨지"

그제야 향릉은 늘 궁금해 하던 문제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약간 들뜬 목소리로 자기가 좋아하는 시에 대해 말을 늘어놓았다.

"제가 좋아하는 시 중에 송나라 시인 육유가 지은 시가 있어요.

"겹겹이 쳐진 문발 걷히지 않아 향기가 오래 서려 있고, 옛벼루가
옴폭 패어 먹물 가득 고여 있네 (중염불권유향구, 고연미요취묵다)"

어때요? 이 시? 훌륭한 착상에 글귀도 절묘하잖아요?"

그러나 대옥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향릉이 시들을 많이 읽어보지 않아서 그래.

이제 왕유와 이태백, 두보의 시들을 공부하고 나면 육유의 그 시가
얼마나 천박한가를 알게 될 거야"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