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과 함께 걸어온 길] (5) 장사동 키드의 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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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욱 < 한국이동통신 사장 >
해방 직후부터 시작된 미군정은 치안 유지와 함께 경제 재건과 부흥을 위한
정책을 펼쳐 나갔지만 그동안 일제에 의해 자행된 민족적 핍박과 경제 침탈,
그리고 남북 분단으로 인한 엄청난 경제적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이같은 사회적인 어려움과 관계없이 미군의 주둔으로 인해 크게
활기를 띤 곳이 있었다.
바로 일본군과 미군이 쓰던 무선기나 부품들을 취급하는 암시장이었다.
암시장의 형성은 그동안 비밀로 취급되었던 군용 무선기나 부품들을 아무나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는 아마추어 무선 애호가들에게 필요한 장비나 부품의 원활한 공급을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억압되었던 무선 취미활동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계기로 받아들여져 시장은 자연스레 활기를 띠었다.
1935년, 이탈리아가 이디오피아를 침입함으로써 시작된 제2차세계대전은
독일이 폴란드에 이어 소련을 공격함으로써 점차 확산되었으며, 1941년
12월에는 일본이 미국과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문자 그대로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미국과 일본의 전쟁은 소모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어 일본의 경우 모두
3만2천여대의 항공기를 생산했지만 80%에 달하는 2만6천2백85대가 특공대로
소모되었다.
따라서 이 때 유지 보수및 정비용품으로 생산된 대부분의 송신기와 수신기
본체, 그 부속 기자재는 결국 운용하지 못한채 남아돌았다.
이러한 상황은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40년부터 미군에서 주문생산한 항공기용 통신 기자재는 종전될 때까지
각군의 보급창고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엄청난 양의 군용 물자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잉여품으로 변하여
민간에 방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방출한 것이었겠지만 이는
뒷날 미군이 주둔했던 많은 나라에 미국의 산업 능력을 과시하고 상품을
홍보하고 기술을 전수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셈이다.
바로 이런 시점과 환경에서 나의 "장사동 키드 시절"이 시작된 것이다.
해방 이후의 장사동에는 각종 라디오 부품과 공구를 파는 상점이 밀집해
있었다.
장사동이란 지금의 광교 건너편 세운상가 근처로 그곳에는 일본의 군용
무선기와 부품을 포함하여 미군의 무선 기기나 부품을 놓고 파는 노점상들이
즐비했었다.
대개 미군부대에서 유출된 폐품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모르긴 해도 몰래
빼내온 물건도 꽤 있었을 것이다.
나는 당시 계동에 있던 휘문중학교를 다니면서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과처럼 장사동을 출입했다.
특히 그 다양한 기기와 부품 가운데 나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군용
무선기였다.
내 용돈으로는 구입할 수 없었지만 듣도 보지도 못한 고성능 미군용
무선기는 어린 마음에 흥분과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했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의 상품이란 일본이 남기고 간 기술이라 보잘것
없었지만 세계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는 미국의 군 통신 장비를 처음 구경
하고 그 중고품이나마 이용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일종의 행운이었다.
그 덕에 부모님께 어렵사리 얻어낸 용돈은 모두 그곳에다 써버려야 했다.
기껏해야 진공관을 몇 개 사면 그만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따르면 "장사동 키드"가 된 셈이었다.
그러나 그런 "장사동 키드"는 나뿐만이 아니었다.
내 또래의 수많은 학생들이 통성명도 없이 이곳을 오가며 어깨를 스쳤으며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끼리는 동류 의식이 생겨서 학교가 같건 다르건,
선배건 후배건 모두 반갑게 대했다.
지금 기억나는대로 그 때 만났던 사람들을 회상해 보면 가장 먼저
조요한씨가 떠오른다.
조요한씨는 나보다 나이가 네댓살 가량 많은 분으로 6.25전쟁 직전에 열린
전국과학박람회에 무선 송수신기를 출품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어 당시
장사동 키드의 최고의 우상이었으며 그는 경기중학교 재학중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무선 과학"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지금도 눈에 선하게 기억할 수 있는데 그 책의 뒷부분에 실린 아마추어
무선편은 아마추어 무선의 세계를 이해시키는 정도를 넘어 어린 우리를
크게 충동시켰다.
뒤에 대학의 동기동창이 된 사람들이지만 반도체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
이라면 누구나 그 이름을 기억하는 강기동씨, 한국전력에서 최고 경영진에
까지 오른 이동호, 김동주씨, 그리고 후배로는 조요한씨의 동생 조요성,
조요윤씨 등이 그 무렵 극성스러운 장사동 키드였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단언컨대 지금 내 기억에 있는 분들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때 장사동을 오가며 만났던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6.25전쟁통에 학도병
이나 의용군으로 끌려가 되돌아오지 못했으며 아마 가난과 굶주림으로 병을
얻어 뜻을 펴지 못한 채 유명을 달리한 이들도 꽤 있을 것이다.
그들의 이름과 인상 말씨 등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들이 살아서 더
좋은 세상을 만났더라면 아마 이나라의 무선 과학과 전자 산업에 이바지하는
좋은 인재가 되었을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곰곰이 생각하면 여기저기 한눈 팔지 않고 지금까지 내가 전공한 분야에
극성스러울 만큼 온갖 열성을 쏟게 한 것도 어쩌면 이들에 대한 정신적인
빚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 중 몇몇은 부산 피난 시절에 결국 만나게 되었으며(역시
부품상가에서)그 때 그 인연을 지속하며 오늘날까지 여전히 이런저런
도움을 주고받고 지내는 분들도 계신다.
특히 나의 삼촌의 친구분으로 당시 KBS에 근무하시던 이중집씨와의 만남은
나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는데 취미 활동을 독려하면서도 그 때문에
학업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는 그분의 충고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한편 이런 인연은 그 분의 상사였던 KBS 이인관 기감님과 이어져 뒷날
나는 그분의 사위가 되었다.
한편으로 장사동 시절은 나에게 일본과 미국의 기술을 비교하고 그 격차를
알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미국의 과학 기술에 대한 느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때 내가 호기심과 두려움을 안고 본 것은 이따금 서울 상공 까마득히
높은 하늘에 나타난 B29라는 폭격기의 네줄 비행운이었다.
일본군은 고사포를 쏘고 히엥(비연)이라는 신예 전투기를 띄웠지만 미국
폭격기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그 아래에서 맴돌다 되돌아갔다.
그때 나는 어린 마음에도 미국이란 나라와 일본과의 기술의 격차를 느꼈고
어렴풋이 일본이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당시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을 주장하며 미국과 전쟁을 벌일 만큼 강력한
군사력을 갖긴 했지만 장기전을 지원할 만큼의 산업과 기술의 수준은, 특히
무선 기술 수준은 그렇게 원활하지 못했던 듯하다.
당시의 물자 사정을 이야기하자면 구리줄 대신에 철사를 대용품으로 써야
했으며 게다가 납의 질도 낮아 제대로 땜질이 되지 못했다.
물론 이런 비교를 가능하게 한 것은 해방 이후 미군의 제품을 보고난
뒤였다.
미군의 땜납 땜인두 페이스트 공구 부품 포장재 등은 일본과 월등한 품질
격차를 드러냈다.
실례로 니크롬선의 성능이 우수하여 웬만해서는 끊어지는 일이 없었으며
땜납 속에 송진이 들어 있는 것도 퍽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성능에 비해 부피가 크고 무거운 일본제 진공관에 견주면 미국제
ST, GT 및 MT 진공관의 위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당시 일본의 부품은 바리콘 3칸이 고작이었지만 미국은 5칸짜리 바리콘을
사용한 수신기가 있었으며 고주파 증폭단과 중간주파 증폭단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좋은 수신을 할 수 있었다.
부품 구입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해방 직후에 나는 슈퍼 헤테로다인의 구성을 계획하고 일본제 부품을 주로
모으고 있었는데 그 무렵 BC-611(SCR-536), BC-342, BC-312, BC-610 같은
미국의 무선 장비를 겉으로나마 구경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 폐기 처분된 GRC-9라는 보병용 단파 무선 송수신기와 GN-58
이라는 수동 발전기를 입수하게 되자 나는 나의 계획을 전면 수정하고
새로운 부품 구입 리스트를 작성하였다.
일본제 진공관이나 부품을 구하는 일에 애를 먹은 탓도 있지만 부피도
훨씬 작고 성능이 좋고, 또 전지 소모가 적은 미국제 진공관에 눈이 쏠린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미국제 부품을 수집하는 일은 좀 힘들었지만 다른 의미에서 좋은
공부가 됐다.
중학교에 다닐 무렵이라 영어 실력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군사기밀이라
그런지 회로정수(회로정수)가 명시되어 있지도 않고 죄다 일련 번호나
컬러코드로만 표기되어 있어 부품들의 정확한 기능과 용도를 알아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또 가격도 어린 나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
그때 장사동을 드나들다 입수한 미군 무선기의 기술 교범(TM)을 통해
구입한 부품의 기능과 용도를 알아내기도 했으며 튜브 테스터로 진공관의
감도를 확인해 보는 등 부지런을 떨었지만 의욕에 비해 그 당시 나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때의 경험은 뒤에 다시 언급되겠지만 군용 무선기를 국산 개발
하는 데에 중요한 교훈을 심어주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30일자).
해방 직후부터 시작된 미군정은 치안 유지와 함께 경제 재건과 부흥을 위한
정책을 펼쳐 나갔지만 그동안 일제에 의해 자행된 민족적 핍박과 경제 침탈,
그리고 남북 분단으로 인한 엄청난 경제적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이같은 사회적인 어려움과 관계없이 미군의 주둔으로 인해 크게
활기를 띤 곳이 있었다.
바로 일본군과 미군이 쓰던 무선기나 부품들을 취급하는 암시장이었다.
암시장의 형성은 그동안 비밀로 취급되었던 군용 무선기나 부품들을 아무나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는 아마추어 무선 애호가들에게 필요한 장비나 부품의 원활한 공급을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억압되었던 무선 취미활동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계기로 받아들여져 시장은 자연스레 활기를 띠었다.
1935년, 이탈리아가 이디오피아를 침입함으로써 시작된 제2차세계대전은
독일이 폴란드에 이어 소련을 공격함으로써 점차 확산되었으며, 1941년
12월에는 일본이 미국과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문자 그대로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미국과 일본의 전쟁은 소모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어 일본의 경우 모두
3만2천여대의 항공기를 생산했지만 80%에 달하는 2만6천2백85대가 특공대로
소모되었다.
따라서 이 때 유지 보수및 정비용품으로 생산된 대부분의 송신기와 수신기
본체, 그 부속 기자재는 결국 운용하지 못한채 남아돌았다.
이러한 상황은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40년부터 미군에서 주문생산한 항공기용 통신 기자재는 종전될 때까지
각군의 보급창고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엄청난 양의 군용 물자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잉여품으로 변하여
민간에 방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방출한 것이었겠지만 이는
뒷날 미군이 주둔했던 많은 나라에 미국의 산업 능력을 과시하고 상품을
홍보하고 기술을 전수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셈이다.
바로 이런 시점과 환경에서 나의 "장사동 키드 시절"이 시작된 것이다.
해방 이후의 장사동에는 각종 라디오 부품과 공구를 파는 상점이 밀집해
있었다.
장사동이란 지금의 광교 건너편 세운상가 근처로 그곳에는 일본의 군용
무선기와 부품을 포함하여 미군의 무선 기기나 부품을 놓고 파는 노점상들이
즐비했었다.
대개 미군부대에서 유출된 폐품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모르긴 해도 몰래
빼내온 물건도 꽤 있었을 것이다.
나는 당시 계동에 있던 휘문중학교를 다니면서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과처럼 장사동을 출입했다.
특히 그 다양한 기기와 부품 가운데 나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군용
무선기였다.
내 용돈으로는 구입할 수 없었지만 듣도 보지도 못한 고성능 미군용
무선기는 어린 마음에 흥분과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했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의 상품이란 일본이 남기고 간 기술이라 보잘것
없었지만 세계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는 미국의 군 통신 장비를 처음 구경
하고 그 중고품이나마 이용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일종의 행운이었다.
그 덕에 부모님께 어렵사리 얻어낸 용돈은 모두 그곳에다 써버려야 했다.
기껏해야 진공관을 몇 개 사면 그만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따르면 "장사동 키드"가 된 셈이었다.
그러나 그런 "장사동 키드"는 나뿐만이 아니었다.
내 또래의 수많은 학생들이 통성명도 없이 이곳을 오가며 어깨를 스쳤으며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끼리는 동류 의식이 생겨서 학교가 같건 다르건,
선배건 후배건 모두 반갑게 대했다.
지금 기억나는대로 그 때 만났던 사람들을 회상해 보면 가장 먼저
조요한씨가 떠오른다.
조요한씨는 나보다 나이가 네댓살 가량 많은 분으로 6.25전쟁 직전에 열린
전국과학박람회에 무선 송수신기를 출품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어 당시
장사동 키드의 최고의 우상이었으며 그는 경기중학교 재학중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무선 과학"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지금도 눈에 선하게 기억할 수 있는데 그 책의 뒷부분에 실린 아마추어
무선편은 아마추어 무선의 세계를 이해시키는 정도를 넘어 어린 우리를
크게 충동시켰다.
뒤에 대학의 동기동창이 된 사람들이지만 반도체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
이라면 누구나 그 이름을 기억하는 강기동씨, 한국전력에서 최고 경영진에
까지 오른 이동호, 김동주씨, 그리고 후배로는 조요한씨의 동생 조요성,
조요윤씨 등이 그 무렵 극성스러운 장사동 키드였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단언컨대 지금 내 기억에 있는 분들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때 장사동을 오가며 만났던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6.25전쟁통에 학도병
이나 의용군으로 끌려가 되돌아오지 못했으며 아마 가난과 굶주림으로 병을
얻어 뜻을 펴지 못한 채 유명을 달리한 이들도 꽤 있을 것이다.
그들의 이름과 인상 말씨 등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들이 살아서 더
좋은 세상을 만났더라면 아마 이나라의 무선 과학과 전자 산업에 이바지하는
좋은 인재가 되었을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곰곰이 생각하면 여기저기 한눈 팔지 않고 지금까지 내가 전공한 분야에
극성스러울 만큼 온갖 열성을 쏟게 한 것도 어쩌면 이들에 대한 정신적인
빚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 중 몇몇은 부산 피난 시절에 결국 만나게 되었으며(역시
부품상가에서)그 때 그 인연을 지속하며 오늘날까지 여전히 이런저런
도움을 주고받고 지내는 분들도 계신다.
특히 나의 삼촌의 친구분으로 당시 KBS에 근무하시던 이중집씨와의 만남은
나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는데 취미 활동을 독려하면서도 그 때문에
학업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는 그분의 충고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한편 이런 인연은 그 분의 상사였던 KBS 이인관 기감님과 이어져 뒷날
나는 그분의 사위가 되었다.
한편으로 장사동 시절은 나에게 일본과 미국의 기술을 비교하고 그 격차를
알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미국의 과학 기술에 대한 느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때 내가 호기심과 두려움을 안고 본 것은 이따금 서울 상공 까마득히
높은 하늘에 나타난 B29라는 폭격기의 네줄 비행운이었다.
일본군은 고사포를 쏘고 히엥(비연)이라는 신예 전투기를 띄웠지만 미국
폭격기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그 아래에서 맴돌다 되돌아갔다.
그때 나는 어린 마음에도 미국이란 나라와 일본과의 기술의 격차를 느꼈고
어렴풋이 일본이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당시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을 주장하며 미국과 전쟁을 벌일 만큼 강력한
군사력을 갖긴 했지만 장기전을 지원할 만큼의 산업과 기술의 수준은, 특히
무선 기술 수준은 그렇게 원활하지 못했던 듯하다.
당시의 물자 사정을 이야기하자면 구리줄 대신에 철사를 대용품으로 써야
했으며 게다가 납의 질도 낮아 제대로 땜질이 되지 못했다.
물론 이런 비교를 가능하게 한 것은 해방 이후 미군의 제품을 보고난
뒤였다.
미군의 땜납 땜인두 페이스트 공구 부품 포장재 등은 일본과 월등한 품질
격차를 드러냈다.
실례로 니크롬선의 성능이 우수하여 웬만해서는 끊어지는 일이 없었으며
땜납 속에 송진이 들어 있는 것도 퍽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성능에 비해 부피가 크고 무거운 일본제 진공관에 견주면 미국제
ST, GT 및 MT 진공관의 위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당시 일본의 부품은 바리콘 3칸이 고작이었지만 미국은 5칸짜리 바리콘을
사용한 수신기가 있었으며 고주파 증폭단과 중간주파 증폭단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좋은 수신을 할 수 있었다.
부품 구입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해방 직후에 나는 슈퍼 헤테로다인의 구성을 계획하고 일본제 부품을 주로
모으고 있었는데 그 무렵 BC-611(SCR-536), BC-342, BC-312, BC-610 같은
미국의 무선 장비를 겉으로나마 구경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 폐기 처분된 GRC-9라는 보병용 단파 무선 송수신기와 GN-58
이라는 수동 발전기를 입수하게 되자 나는 나의 계획을 전면 수정하고
새로운 부품 구입 리스트를 작성하였다.
일본제 진공관이나 부품을 구하는 일에 애를 먹은 탓도 있지만 부피도
훨씬 작고 성능이 좋고, 또 전지 소모가 적은 미국제 진공관에 눈이 쏠린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미국제 부품을 수집하는 일은 좀 힘들었지만 다른 의미에서 좋은
공부가 됐다.
중학교에 다닐 무렵이라 영어 실력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군사기밀이라
그런지 회로정수(회로정수)가 명시되어 있지도 않고 죄다 일련 번호나
컬러코드로만 표기되어 있어 부품들의 정확한 기능과 용도를 알아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또 가격도 어린 나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
그때 장사동을 드나들다 입수한 미군 무선기의 기술 교범(TM)을 통해
구입한 부품의 기능과 용도를 알아내기도 했으며 튜브 테스터로 진공관의
감도를 확인해 보는 등 부지런을 떨었지만 의욕에 비해 그 당시 나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때의 경험은 뒤에 다시 언급되겠지만 군용 무선기를 국산 개발
하는 데에 중요한 교훈을 심어주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