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필자는 자유베를린 대학에서의 "통일세미나"에 참석했었다.
동.서독이 통일된지 오는 10월3일로 6주년이 되는 시점이라 양 지역간의
물질적 격차나 정신적 이질감이 상당부분 해소됐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그곳에 갔다.
하지만 베를린의 모습은 필자의 기대에 크게 벗어났다.
동서지역간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피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1989년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통일의 상징으로 다가왔던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나 들어간 동베를린은 마치 대공습을 받고난 후 재건에
나선 것처럼 도시전체가 잿빛 시멘트로 얼룩진 건설현장처럼 보였다.
우중충한 아파트와 관공서만 즐비하고 가로수 한 그루 찾기 힘든 상황만
인상적이었다.
다시 같은 문을 지나 서베를린으로 갔을 때는 마치 마법의 문을 통과해
패션쇼장에 들어서는 것 같았다.
화려한 쇼핑거리나 조형미 넘치는 건축들,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녹색의
공원, 이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른 세계로 들어오는 느낌을 갖게 했다.
실제 동.서독간의 격차는 이러한 외관상의 차이 이상이었다.
독일 연방정부는 지난 5년 동안 8,000억마르크(약 400조원)이상의 공공
재정을 동독지역에 투자했으나 도로 등 사회간접시설은 여전히 부족하고
실업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동독주민은 통일후 2등 국민으로 전락했다는 허탈감에, 서독주민은 통일
비용 부담이라는 경제적 박탈감에 싸여 있는 것을 몇 마디의 대화를 통해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러한 통일 독일의 모습은 우리의 통일문제를 생활속에서 느끼게 하였다.
구체적 마스터플랜 없는 흡수통일이 가져올 고통은 독일보다 우리가 더욱
클 것이다.
한국은 경제규모면에서도 독일에 미치지 못하고, 남북간 전쟁으로 생긴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분단상황을 무작정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독일인은 이러한 동서 지역간 갈등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분단상황
아래 상존해 왔던 안보에 대한 공포에서 완전히 벗어나 통일독일 재건이라는
희망과 게르만 민족의 자부심에 가득차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며 통일의 당위성을 실례로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통일을 이루어야 할 것인가.
바람직한 통일전략은 북한과 인내를 갖고 대화와 교류를 증진시키고 북한이
경제적으로 보다 나은 상태가 될 때 점진적으로 우리와 통합하는 중장기적
통일구상이 좋을 듯 싶다.
그래야 통일로 유발될 수 있는 한반도 경제체제의 충격과 남북한 주민의
이질감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통일은 반드시 논리적으로만 설명되지 않는 것 같다.
여기에 예기치않은 통일 사태에 대비하는 자세가 정부뿐 아니라 국민적
차원에서도 중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독일의 통일 전문가들로부터 반복해 들은 이야기는 통일 당시 어느 누구도
이를 예측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한국의 경우도 어느날 갑자기 이러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지적
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의 과제는 남북한 통일을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이루어내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이와 동시에
독일의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예측 못할 통일에 대비하는 지혜를 서둘러
축적해 나가는 것이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