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증권정책의 실험장 .. 박영균 <증권부장>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지난 7월 12일 여의도 증권거래소.
증권제도개선에 관한 공청회가 열리고 있는 국제회의장의 5백여좌석은
빈자리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딱딱한 정책공청회치고는 청중동원에는 성공적이라 할만했다.
정부 스스로 한국판 빅뱅이라고 평가할 만큼 주식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난 제도개편이어선지 증권계의 주요인사들은 빠짐없이 참석했다.
공청회는 일사천리로 매끄럽게 진행됐다.
개회선언에 이어 각 분야별 전문가들이 주제발표를 하고 토론자들이
이에 대해 코멘트를 하는 순서였다.
별로 문제가 될만한 내용이 없는듯 했다.
토론자들간에 언성을 높아지는 이렇다할 논쟁도 없었다.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부에선 질문이 나오기도 했으나 이런 점잖은 공청회가 늘상 그렇듯이
시간상의 이유로 막을 내렸다.
이번 제도개선안이 그대로 시행될 경우 공개를 추진했던 많은 기업들이
공개를 할 수 없게 됐음에도 이점에 대해선 반대의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며칠후 풍정산업이라는 자동차부품업체가 자진해서 공개를
철회했다.
이유는 공개하더라도 별로 도움이 안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기업공개와 증시상장은 중소기업들에겐 꿈같은 일이다.
얼마전 까지만해도 기업들은 공개를 위해 치열한 경쟁을 감내해야 했다.
공개기준에 미달하는 일부 기업들은 로비를 벌이기도 했다.
과연 이번 제도개선안의 영향만으로 다른 기업들도 공개를 포기할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공개를 추진했던 다수의 기업들이 새로운 기준을 갖추지 못해
앞으로 공개를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인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서 이번 증권제도개편의 성패여부를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후유증이 충분히 예상됐음에도 공청회에선 왜 아무일
없는 듯 조용히 넘어갔는가 하는 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공청회에 상장기업대표자나 공개를 희망하는 기업관계자를 참석시킬 수는
없었을까.
만약에 이들이 나왔다면 제대로 의견을 발표할 수 있었을까.
비공식적으로 들은 대답은 이렇다.
"기업을 그만둘 생각이라면 모를까. 어떻게 그런 자리에 가서 얘기할수
있습니까. 증권당국자들한테 밉보였다간 거덜이 날텐데요" (최근 상장한
중견기업의 대표)
공청회가 조용했던 이유는 또 있다.
이날 증권경제연구원 주최의 공청회에서 발표된 내용은 이미 바로
전날 금융산업발전심의위원회에 보고됐다.
사실상 중요한 제도개편의 줄기는 이미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기에
참석자들은 굳이 의견을 내놓을 만한 기분이 아니었다.
정책공청회가 아니라 실은 정책발표회라고 보는 게 옳았다.
증권경제연구원의 입을 빌어 내놓은 시안이었으나 이를 액면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물론 이런 공청회나 회의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다.
대부분은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뛰는 사람들의 얘기는 아니다.
다른 정책회의들도 대개 그런 식이다.
미리 각본을 짜놓는 구색맞추기식 회의여서는 곤란하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설령 정부가 마음을 열고 여론수렴을 하려고
해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얼마전 관광진흥 확대회의가 열렸을 때의 얘기다.
서울의 모 관광호텔사장은 대통령이 주재하는 이날 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관광업계의 애로사항을 얘기해 달라는 것이다.
업계의 대표자격으로 발언하는 자리인 만큼 개인적으로는 영광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잠시후 다른 급한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댈수 밖에 없었다.
괜히 그 자리에 나가 얘기해봤자 공무원들의 미움만 살게 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지 않으면 각본대로 얘기해야 하는데 그러기는 싫다는 것이다.
이런 식이다보니 정책이 만들어지기까지는 그야말로 매끄럽다.
과연 최고 엘리트가 모인 관료들이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방향으로 정책을 만들라는 주문이 떨어지면 즉각 방안이 마련된다.
정책생산에 관한한 선진국보다 생산성이 월등히 높다고 해야 옳다.
더군다나 구태여 현장의 목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다.
설령 얘기를 듣겠다고 자리를 마련해줘도 말하는 기업인은 없다.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일본의 관료들은 한국관료들을 무척 부러워하는
모양이다.
공청회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다른 채널을 통해서라도
들어야한다.
그래야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이 나오지 않는다.
불과 사나흘후에 정책이 뒤바뀌는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정책담당자들이 현장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한국은 경제정책의 실험장이라는 오명은 이제 더 이상 들어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19일자).
증권제도개선에 관한 공청회가 열리고 있는 국제회의장의 5백여좌석은
빈자리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딱딱한 정책공청회치고는 청중동원에는 성공적이라 할만했다.
정부 스스로 한국판 빅뱅이라고 평가할 만큼 주식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난 제도개편이어선지 증권계의 주요인사들은 빠짐없이 참석했다.
공청회는 일사천리로 매끄럽게 진행됐다.
개회선언에 이어 각 분야별 전문가들이 주제발표를 하고 토론자들이
이에 대해 코멘트를 하는 순서였다.
별로 문제가 될만한 내용이 없는듯 했다.
토론자들간에 언성을 높아지는 이렇다할 논쟁도 없었다.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부에선 질문이 나오기도 했으나 이런 점잖은 공청회가 늘상 그렇듯이
시간상의 이유로 막을 내렸다.
이번 제도개선안이 그대로 시행될 경우 공개를 추진했던 많은 기업들이
공개를 할 수 없게 됐음에도 이점에 대해선 반대의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며칠후 풍정산업이라는 자동차부품업체가 자진해서 공개를
철회했다.
이유는 공개하더라도 별로 도움이 안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기업공개와 증시상장은 중소기업들에겐 꿈같은 일이다.
얼마전 까지만해도 기업들은 공개를 위해 치열한 경쟁을 감내해야 했다.
공개기준에 미달하는 일부 기업들은 로비를 벌이기도 했다.
과연 이번 제도개선안의 영향만으로 다른 기업들도 공개를 포기할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공개를 추진했던 다수의 기업들이 새로운 기준을 갖추지 못해
앞으로 공개를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인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서 이번 증권제도개편의 성패여부를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후유증이 충분히 예상됐음에도 공청회에선 왜 아무일
없는 듯 조용히 넘어갔는가 하는 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공청회에 상장기업대표자나 공개를 희망하는 기업관계자를 참석시킬 수는
없었을까.
만약에 이들이 나왔다면 제대로 의견을 발표할 수 있었을까.
비공식적으로 들은 대답은 이렇다.
"기업을 그만둘 생각이라면 모를까. 어떻게 그런 자리에 가서 얘기할수
있습니까. 증권당국자들한테 밉보였다간 거덜이 날텐데요" (최근 상장한
중견기업의 대표)
공청회가 조용했던 이유는 또 있다.
이날 증권경제연구원 주최의 공청회에서 발표된 내용은 이미 바로
전날 금융산업발전심의위원회에 보고됐다.
사실상 중요한 제도개편의 줄기는 이미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기에
참석자들은 굳이 의견을 내놓을 만한 기분이 아니었다.
정책공청회가 아니라 실은 정책발표회라고 보는 게 옳았다.
증권경제연구원의 입을 빌어 내놓은 시안이었으나 이를 액면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물론 이런 공청회나 회의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다.
대부분은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뛰는 사람들의 얘기는 아니다.
다른 정책회의들도 대개 그런 식이다.
미리 각본을 짜놓는 구색맞추기식 회의여서는 곤란하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설령 정부가 마음을 열고 여론수렴을 하려고
해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얼마전 관광진흥 확대회의가 열렸을 때의 얘기다.
서울의 모 관광호텔사장은 대통령이 주재하는 이날 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관광업계의 애로사항을 얘기해 달라는 것이다.
업계의 대표자격으로 발언하는 자리인 만큼 개인적으로는 영광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잠시후 다른 급한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댈수 밖에 없었다.
괜히 그 자리에 나가 얘기해봤자 공무원들의 미움만 살게 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지 않으면 각본대로 얘기해야 하는데 그러기는 싫다는 것이다.
이런 식이다보니 정책이 만들어지기까지는 그야말로 매끄럽다.
과연 최고 엘리트가 모인 관료들이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방향으로 정책을 만들라는 주문이 떨어지면 즉각 방안이 마련된다.
정책생산에 관한한 선진국보다 생산성이 월등히 높다고 해야 옳다.
더군다나 구태여 현장의 목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다.
설령 얘기를 듣겠다고 자리를 마련해줘도 말하는 기업인은 없다.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일본의 관료들은 한국관료들을 무척 부러워하는
모양이다.
공청회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다른 채널을 통해서라도
들어야한다.
그래야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이 나오지 않는다.
불과 사나흘후에 정책이 뒤바뀌는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정책담당자들이 현장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한국은 경제정책의 실험장이라는 오명은 이제 더 이상 들어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