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이 모자라 "쌀 증산"을 외치던 때가 있었다.

한 톨의 쌀이라도 더 생산코자 농민들이 허리를 접은채 논일에 매달려야
했다.

70년대 중반 우리 농토에 "통일볍씨"가 보급되면서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식량자급의 쾌거를 이루게 된다.

이 혁명적인 사건 뒤에는 우수 쌀 품종 개발에 혼신의 힘을 바쳤던
육종연구원들이 있었다.

농업진흥청 산하 작물시험장 수도육종과의 농업연구사(6급상당)인
정국현씨(30).

그는 식량자급을 달성했던 선배들의 뒤를 잇는 신세대 "쌀 연구원"이다.

정연구사의 작업장은 기온이 섭씨40도를 넘나드는 수원 작물시험장의
비닐하우스.

그는 오늘도 더 맛있으면서도 생산량이 많은 쌀, 병충해 면역성이 강한
쌀 품종을 개발하고자 구슬땀을 흘리고있다.

우수한 품종 하나를 뽑아내기위한 벼품종 교배 작업이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주먹으로 훔치는 그의 얼굴에 진지함이 가득하다.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 일할 사람이 없다고 아우성인 요즘 그는 우리
농촌을 지켜보겠다고 나섰다.

서울농대 농학과를 졸업한뒤 다른 학우들은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기업이나 해외로 유학을 떠났지만 그는 연구직 공무원의 길을 선택했다.

그도 한때는 농학연구를 위해 유학갈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벼 품종개발수준 만큼은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라는 점이 그를
잡았다.

대학시절 2년동안 작물시험장 아르바이트를 통해 알게된 벼 품종연구의
매력도 그의 마음을 잡았다.

그는 지금도 서울대에서 작물학 석사과정을 밟고있다.

그는 곧 "신토불이"박사가 된다.

그가 연구사생활에서 가장 보람을 느낀 것은 작년 "슈퍼쌀"(초다수쌀)이
탄생됐을 때.

농진청에 들어간후 3년간 11명의 육종팀원과 함께 팀장인 최영근박사의
지도를 받아가며 슈퍼쌀 개발에 매달린 끝에 다른 쌀보다 50%나 많이
생산되는 슈퍼쌀을 개발해냈다.

"WTO(세계무역기구)다, 쌀시장 개방이다해서 온 나라가 떠들썩할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쌀시장을 지키겠다는 실질적인 노력은 부족했던 것 같아요"

정연구사는 자신의 일에 대해 이같이 의미를 부여한다.

우량 쌀 품종 개발은 생각 만큼 쉽지 않다.

우수한 품종 하나 개발키위해서는 수만번 실패가 예정된 교배 작업을
되풀이 해야한단다.

슈퍼쌀 개발에 10년 걸렸다는게 이를 말해준다.

정연구사는 이를 두고 "도공이 자기 맘에 드는 작품을 얻기위해 화덕에서
막 나온 도자기를 깨는 심정"에 비유했다.

정연구사에게 가장 친한 벗은 들녘에서 자라고 있는 벼.

햇빛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고있는 벼를 보는게 가장 큰 행복이다.

병충해를 당한 벼를 보면 자기 몸에 상처를 입은 것 만큼이나 마음이
아프다.

요즘 여름철 답지 않게 서늘한 날이 계속돼 "친구"들이 혹 냉해를
입지 않을까 큰 걱정이다.

"베스트셀러 벼를 만드는게 최대 꿈입니다.

50년 정도 심겨질수 있는 벼품종을 개발할수만 있다면 더 바랄게
없습니다"

정연구사의 야무진 꿈이다.

<한우덕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