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도 환경도 열악한 인도땅.

그러나 인류 4대문명 발상지의 하나로 찬란한 정신문화를 꽃 피워온 데
대한 인도인들의 자부심은 그 어느 선진국 못지 않다.

그리고 그 자부심만큼이나 무한한 발전 잠재력을 간직한 나라가 인도다.

이런 인도에서 "한국인"의 자부심을 선양하고 있는 기업인이 있다.

토이 앤 토이 인터내셔널사 전무, 한스 인터내셔널사 사장,
지레 인터내셔널사 사장 등 3개의 직함을 갖고 있는 이중훈씨(46)가
그 주인공이다.

이사장이 인도땅에 첫발을 내디딘 건 지난 87년 3월.

현대중공업의 뉴델리 주재원 자격이었다.

당시 현대중공업은 해상 석유 및 가스 시추설비를 제작해 뭄바이 해상에
설치하는 대형공사를 인도 국영 석유공사인 "ONGC"사로부터 수주받아
추진하고 있었다.

애당초 이사장의 뉴델리 근무기간은 3년이었다.

하지만 시추설비를 제작하고 설치하는 대형공사와 이에 따른 사후 처리가
3년만에 끝날 수는 없었다.

근무기간이 3년 연장되고 결국 그는 6년간을 뉴델리에서 근무하게 됐다.

6년간의 뉴델리지사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본사의 귀임명령을 받은 그는
그동안 잊고 지냈던 자녀교육 문제라는 고민거리에 부닥쳤다.

자녀들이 6년간이나 인도 외국인학교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한국에 돌아가서
과연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녀교육에 대한 이 고민이 그의 인생항로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평소 이사장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현지인 동료가 "이번에 아예 이곳에
정착하는게 어떻겠느냐"고 권유해온 것.

이 동료는 때마침 한국인 관리자를 찾고 있던 토요그룹계열의 "토이 앤
토이 인터내셔널"사 회장과 사장을 소개해줬다.

당시 "토이 앤 토이 인터내셔널"에 이사장은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이 회사 공장에는 기능공이 700명 정도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인도
공용어중 하나인 힌디어 밖에 모르고 중간 관리자들만이 영어를 좀 하는
편이었다.

또 공장에 상주하는 4명의 한국인 기술자들은 영어가 서툰 상황이어서
의사소통이 큰 문제였다.

따라서 6년간의 인도생활을 통해 영어와 힌디어에 능통하게 된 이사장은
이들의 관리자로 더없이 적격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동차용 스프링 제조업체로 시작해 4~5개 회사로 구성된
토요그룹의 향후 사업 확장을 위해서는 프로젝트에 경험이 많고 한국과
인도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같은 이유로 토요그룹의 회장과 사장은 이사장의 영입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한 토이 앤 토이 인터내셔널에서의 생활이 생각처럼
편하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근무처가 뉴델리 변두리에 자리잡고 있어 출퇴근에 불편이 많이
따랐다.

매일 3시간이상 포장도 안된 도로를 따라 덜컹거리며 차를 몰고 다니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고된 일이었다.

냉방이 안돼 차창을 열고 다니는 바람에 기관지도 성할 날이 없었다.

하지만 인도에서 사업기반을 마련해야겠다고 결심한 그에게 이러한 경험은
오히려 인도의 실정을 피부 깊숙이 느낄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가족을
위해서라도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는 각오를 더욱 다지는 계기가
됐다.

그의 이런 열성으로 토이 앤 토이 인터내셔널의 사업은 크게 성공했고
그 공로로 그는 입사한지 얼마안돼 전무로 승진했다.

그가 맡은 일은 마케팅, 해외 수입상과의 수출상담, 원자재수입및 구매,
완제품수출 및 인사관리 등의 업무.직접적인 제품생산을 제외한 거의 모든
업무를 책임진 셈이다.

한참 회사운영에 재미를 붙여가던 중 이전무에게 첫번째 사업시련이
다가왔다.

전세계를 긴장시켰던 94년의 페스트 발생이 그 시련이었다.

당시 "토이 앤 토이 인터내셔널"은 일본수입상과 1년간의 봉제완구 수출
계약을 체결하고 있었는데 일본 수입업자쪽에서 느닷없이 주문중단을 통보
해왔다.

어린이들이 갖고 노는 봉제완구를 페스트가 발생한 나라에서 수입할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뜻하지 않은 사태에 회사가 대책을 찾느라 전전긍긍하던중 이전무는
과감히 업종을 의류로 전환할 것을 제안했고 이 제안은 결과적으로 대성공
이었다.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삼은 발상의 전환이었다.

이렇게 큰 고비를 넘긴 그는 본격적인 사업가로서의 자신감을 얻고 94년
11월에는 "토이 앤 토이 인너내셔널"과 50대50의 지분으로 "한스인터내셔널"
이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했다.

그동안 이전무의 경영능력에 대해 신뢰감을 갖게된 토이 앤 토이
인터내셔널측에서는 기꺼이 동업에 동의했고 경영일체를 그에게 맡겼다.

"한스 인터내셔널"은 한국으로부터 섬유류 석유화학제품 기계류를 수입해
인도에 팔고 인도제품을 한국에 수출하는 무역회사다.

그는 또 작년 7월에는 평소 친분관계를 맺고 있던 인도인과 합작으로
"지레 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도 설립했다.

면사 직물 의류 등을 한국에 수출하고 자동차부품 및 섬유류 등과 같은
중소기업형 한국기술이 인도시장에 진출할 수 있도록 자문하는 회사다.

현재 "토이 앤 토이 인터내셔널"은 (주)대우와 기술제휴를 맺고 남성용
의류를 생산하고 있다.

"현재는 일본에만 수출하고 있으나 앞으로는 미국및 유럽등으로 수출시장을
다변화할 계획"이라고 이전무는 말한다.

생산제품도 여성용 의류 및 가죽의류 등으로 다양화할 방침이다.

물론 이처럼 사업을 확장해가는 과정에서 고충도 적지 않았다.

우선 인도의 이질적인 문화에 적응하는 일이 애를 먹였다.

인도생활에는 꽤 이골이 났다고 믿었던 그였지만 자신의 첫사업인
한스 인터내셔널을 세우는 과정에서는 그런 자신감을 회의하지 않을수
없었다.

가령 서류 한장을 떼는 일만 해도 처음 전화로 문의할때는 "노 프로블럼"
이라던 관리가 막상 서류를 들여다 보면서는 이것 저것 따지고 들어 애를
먹이곤 했다.

때문에 그는 지금도 "인도인의 노 프로블럼은 "50% 프로블럼"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현지 진출 한국기업인들에게 충고한다.

또 과거 한국인들의 시간관념이 코리안 타임이라는 달갑지 않은 용어를
낳았듯이 인도인들의 시간관념도 엉망이어서 사업에 낭패를 본 적도 많았다.

일본 바이어를 저녁식사에 초대해놨는데 인도쪽 동업자들이 시간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결국은 거래가 깨지고 만 것.

이처럼 시행착오로 점철된 인도에서의 9년간의 생활을 통해 이사장은 이제
음식 등 풍습 뿐만 아니라 인생관을 비롯한 정신적인 문제까지 인도사람들을
가장 잘 이해하는 한국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사장은 "인도인은 인도인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인도인들은 비록 물질적으로 궁핍할지라도 정신적으로는 매우 여유있고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다.

마음을 열고 스스럼없이 대하면 그 이상으로 가까워지려고 하는 것이
인도인들의 습성이다"고 말한다.

이런 이사장을 인도인들은 "터번을 안두른 인도인"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사장은 "내가 세운 회사들이 비록 규모는 작지만 한국과 인도간 경제
협력의 가교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8억5,000만이라는 거대한 인구와 풍부한 천연자원을 간직한 이 나라는
중국과 함께 아시아의 "차세대 주자"로 뛰어오를 가능성을 품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