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섬이 난간에 널린 빨래를 걷다가 청문을 보고는 손짓을 하였다.
청문이 춘섬에게로 다가가자 춘섬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이 저녁에 무엇 때문에 왔어?"
"보옥 도련님 심부름으로 대옥 아가씨에게 전할 물건이 있어서"
"그래? 대옥 아가씨는 잠이 든 것 같은데.
아마 피곤해서 잠시 잠이 든 걸거야. 내가 한번 살피고 올게"
춘섬이 안방 문을 살며시 열고 들여다보더니 청문에게 와도 좋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청문이 방으로 들어가자 대옥이 방금 깨어 일어났는지 머리를 매무시하고
있었다.
약간 파리한 듯하면서도 청초한 대옥의 얼굴이 희끄무레한 어둠속에서
더욱 아름답게 돋보였다.
저렇게 아름다우니 보옥 도련님이 반할만도 하지. 청문은 슬그머니
대옥에 대해 부러움을 느끼며 대옥에게 아뢰었다.
"도련님이 이걸 갖다 주라고 해서 왔어요"
대옥이 청문이 내미는 손수건을 보고는 말했다.
"난데없이 손수건을 왜 보냈을까.
난 손수건이 많아 처치 곤란인데. 손수건을 보낸 걸 보면 어디서 새로
들어온 아주 고급품인 모양이지?"
대옥의 말에 청문은 자기도 모르게 그만 쿡 하고 웃음을 토하였다.
"왜 웃는 거니?"
"새로 들어온 고급품이 아니고요 평소에 쓰던 헌 손수건이에요.
도련님이 왜 이걸 대옥 아가씨에게 갖다 주라고 하는지 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나만 혼나게 말이에요"
"헌 손수건이라구? 얘, 춘섬아, 등불을 좀 켜라, 이 얘들이 아직까지
불도 켜지 않았어"
"네, 네. 아가씨께서 주무시길래...... 지금 곧 등불을 켤게요"
춘섬이 당황해 하며 등불 심지를 돋우어 불을 밝혔다.
대옥이 손수건들을 등불에 비추어 보며 청문의 말을 확인해보았다.
"정말로 헌 손수건이네"
대옥이 손수건의 구겨진 부분을 살펴보며 잠시 고개를 모로 돌리고
생각에 잠겼다.
청문은 대옥이 화를 참고 있다고 여기며 언제 그 화가 폭발할지 몰라
긴장하며 기다렸다.
"알았다. 가보아라"
청문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얼른 대옥의 방을 빠져나왔다.
대옥은 춘섬이더러 벼루와 붓을 가져오게 하고 손수건 두 개를 자기
앞에 펼쳐놓았다.
그러고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또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대옥이 붓을 들어 손수건에 시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