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행 5년차인 이씨는 월급날만 되면 기분이 상한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는 남자 동기생에 비해 월급여가 15만원이나 적기
때문이다.
상여금이 나오는 달엔 차액이 20만원을 넘는다.
이 남자동기는 병역을 면제 받아 이씨와 나이가 같다.
그럼에도 단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월급이 많은 것이다.
입사 첫해 초봉은 5만원 가량 밖에 차이가 안났다.
하지만 해를 넘길수록 남자 동기와의 월급 차이는 더욱 벌어졌다.
이제는 화가 치밀 정도다.
남자동기와 월급 차이가 앞으로도 계속 커질 걸 생각하면 이씨는 어깨에
힘이 빠진다.
직장내 남녀간 임금격차는 성차별의 대표적 예이다.
여성들이 피부로 느끼는 "현실적인 차별"이기 때문이다.
똑같이 대학을 졸업해 입사시험을 보고 회사에 들어와 같은 업무를
하더라도 여성들의 노동은 남성에 비해 "제값"을 받지 못하는게 현실이다.
대한상의가 지난해 전국의 1,956개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표준임금을
조사한 결과에서도 이같은 사실은 뚜렷이 드러난다.
사무직 남자 신입사원의 경우 초임은 기본급과 수당을 합쳐(상여금 제외)
월 72만3,972원.
반면 같은 조건의 여성은 62만9,472원에 그친다.
평균 9만4,500원의 차이가 나는 셈이다.
4년 근속한 사원의 경우엔 이 격차가 13만원이상으로 불어난다.
특히 국제노동기구(ILO)가 발행한 "노동통계연감"은 한국의 남녀간 임금
격차가 후진국 수준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제조업의 여성임금은 남성임금의 52.2%(93년기준).
대부분의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이 70~80%에 달하는 것에 비하면
크게 저조한 실정이다.
남녀간 임금차별의 형태는 여러가지다.
우선 남성과 여성의 호봉체계를 아예 분리 적용하는 직접적인 차별이
있다.
여성들의 호봉이 남성들에 비해 불리한건 물론이다.
또 남성에게만 가족수당을 지급하는등 각종 수당에서의 차별도 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원시적인, 어떻게 보면 "순진한" 수법이다.
실제로 지난 89년 남녀고용평등법에 "동일가치 노동, 동일임금" 원칙
(제6조)이 포함된 이후 이렇게 눈에 띄는 "직접 차별"은 줄고 있는 추세다.
문제는 최근들어 눈에 보이지 않는 "간접 차별"이 횡행한다는 점이다.
합법을 위장한 불법사례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단적인 사례가 은행들이 지난 92년말 여행원제도를 없애면서 도입한 이른바
"신인사제도"다.
신인사제도는 기본급의 차이를 남녀로 구분하지 않고 일반직과 사무직등
직군으로 나눠 적용하는 것.
외형적으론 남녀차별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눈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다.
"신인사제도의 문제는 직군의 구분이 직무와 관계없다는 점입니다. 단지
남성과 여성의 호봉을 달리하기 위한 눈가림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예컨대
모은행은 일반직의 경우 연고 구분없이 전보를 하거나 숙직을 해야 한다는
의무규정을 만들어 여성들이 원천적으로 진입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당연히 봉급이 많은 일반직은 남성, 봉급이 적은 사무직은 여성이 선택할 수
밖에 없도록 해 놓은 겁니다. 아주 교묘한 남녀임금차별이죠"(김영주
금융노련 부위원장)
이같은 신인사제도는 현재 한국은행과 하나 보람 신한은행등이 시행하고
있으며 다른 은행들도 도입을 추진중이다.
고용평등법 강화로 남녀간 임금차별이 금지되자 임시직 여성고용을 늘리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여성을 정식으로 채용하면 남성과 동등한 임금을 줘야 하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정규채용을 줄이려는 편법이란 얘기다.
특히 금융권에선 90년대 들어 시간제(Part time) 여성근로자의 채용이
급증하고 있다.
금융노련에 따르면 지난해 7월말 현재 총 19개 시중 국책 지방은행의
시간제 여성근로자는 2,866명에 달한다.
남자의 경우 21명인 것을 보면 임시직은 거의 "여성만을 위한 자리"임에
틀림없다.
제일 조흥등 6대 시중은행만 따지면 여직원 1만7,034명중 1,871명이
임시직으로 전체의 10%를 넘는다.
이들은 그러나 말이 시간제 근로자이지 정규행원과 똑같이 하루에 8시간씩
근무한다.
하는 업무도 동일하다.
결국 여성을 싼 값에 쓰려는 고용주의 "묘수"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
남녀고용평등법이 엄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차별이 일어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법적용의 비현실성을 이유로 든다.
"고용평등법의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직무급 임금체계에서나 지켜질 수
있습니다. 한국과 같이 학력과 연공 위주의 임금관행에선 적용하기가 쉽지
않지요. 기업들이 신인사제도등으로 법망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이런 배경
입니다"(정연앙 중앙대 교수)
또 고용평등법 위반업체에 대한 처벌이 "솜 방망이"인 것도 한가지 이유가
될 수 있다.
이달초 서울지법이 연세대에 대해 "성차별 호봉"을 시정하라며 100만원의
벌금을 물린걸 보면 알 수 있다.
고용평등법 위반사업자에 대한 처벌은 1,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불과한
것이다.
기업주 입장에선 여성들의 임금을 남성 수준으로 올리는 것보다 벌금을
내는게 훨씬 "경제적"으로 돼 있다.
물론 기업들은 여성의 생산성이 남성보다 낮다거나 생리휴가등 추가 비용이
든다는 점을 임금차별의 근거로 제시할지 모른다.
그러나 엄밀한 생산성 분석없이 이같이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단지 편견이란 비판을 면치 못할 뿐이다.
특히 한국기업의 성차별적인 임금체계는 직장여성들의 "불만 1호"라는
점을 감안하면 여성을 일터로 향하게 하기 위해 풀어야할 최대 과제라
할만하다.
< 차병석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