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 자 : 조지 바살라
*** 역 자 : 김동광
*** 출판사 : 까치
아직도 지식인들 가운데는 기술지상주의가 팽배하다.
아마 한국의 지식층에는 그런 경향이 더욱 강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즉 기술의 발달은 오늘의 인류사회를 풍요롭고도 놀라운 세상으로 이끌어
왔고, 이 경향은 앞으로도 지속되리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이에대해 심각한 반성의 소리가 없지않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오늘의
과학기술문명이 안고있는 모순들은 기술의 발달로 극복될수 있다는 생각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혹시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조지 바살라의 이 책을 보고 왜 그런
믿음이 잘못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 같다.
도대체 기술의 발달이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듯 주로 경제적 필요에서
또는 인간의 욕구에 따라서만 이뤄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술에는 그 나름의 논리가 있어서 기술자체의 논리와 생명력에
따라 발달해 왔다고 할수가 있다.
생물의 진화처럼 기술도 인간을 위해서 또는 인간이 설정한 목표를
위해서만 발달해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바살라는 기술의 역사를 말할때 흔히 빠지기쉬운 영웅사관도 배격하고
있다.
우리는 에디슨 말코니 벨등의 발명가들을 위대한 기술상의 영웅으로
치고 있지만, 따지고보면 이들의 혁명적 발명으로 인간의 기술이 갑자기
발달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기술이란 완만한 진화과정으로 발전해왔다.
기술은 "혁명"을 통해 발달하는 것이라기보다 점진적 "진화과정"인 것이다.
쿤의 책으로 유명해진 과학은 혁명을 통해 발전해 왔다는 해석과는 조금
다른 관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바살라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위해 많은 예를 들었고 그 가운데
인쇄술에 관한 부분이 있다.
인쇄기술을 처음 완성한 민족은 중국인이다.
경제사가 한사람은 인쇄기술이 역사에 미친 영향을 바퀴의 발명 다음갈
정도로 중요한 것이라 평가하고있다.
그런데 왜 인쇄술이 먼저 발달한 중국이나 동양에서는 그것이 별로 사회
발전에 영향을 주지않고, 오히려 서양에서 큰 효과를 냈던 것일까.
그 원인에 대해 바살라는 다른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한자의 복잡성을 든다.
이에 덧붙여 그는 한자문명권에서는 목판인쇄가 활자인쇄보다 더욱
아름다웠기 때문에 활자인쇄가 나왔어도 그것이 널리 채택되지 않았다는
측면을 지적한다.
재미있는 해석이다.
인쇄술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한국에 관한 언급이 두차례 간단히 있지만
한국인에게는 불만스런 정도다.
이 책은 기술사가 아니라 기술사를 어떻게 보아야할 것인가를 진단한
"기술사의 역사론"이라 할수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기술에는 생물계 못지않은 다양성이 있고 인간은 그런
기술들을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왔다.
다만 그 필요란 단순히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런 다양한 기술 가운데 어느것이 선택되어 살아남고 발전하게
되는가는 마치 생물의 종이 선택되는 이치와 비슷하다.
"캠브리지 과학사 시리즈"의 한 권으로 1988년판을 옮긴 이 책은 과학사
기술사만이 아니라 인류학 사회학 과학기술론 등에 관심을 가진 독자에게
도움될만 하다.
번역은 이만하면 잘 읽히는 것으로 보인다.
박성래 <한국외대 부총장/과학사>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