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 (223) 제7부 영국부에 경사로다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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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달밤에 여기 창가에 앉아 책을 읽는다면 덧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한탄하지는 않으리"
가정이 앞뜰과 대나무 숲이 건너다보이는 마루에 앉아 집 대들보며,
기둥이며 방문과 창문들을 연신 둘러보며 감탄의 기색을 거둘 줄 몰랐다.
보옥은 아버지 가정이 달빛이 교교하게 비치는 달밤에 이 집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떠올려보며 그것 참 운치 있는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덧없는 인생 운운한 것이 인상깊었다.
늘 엄격하고 빈틈이 없고 까다롭기로 유명한 아버지인지라 인생의
허무 같은 것은 도저히 느끼지 못하는 사람으로 알았는데, "덧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한탄하지는 않으리(불왕 생일세)"와 같은 멋있는
구절도 읊을 줄 알다니.
"여기 편액에는 넉자 이름을 적어 넣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문객들이 가정의 마음을 헤아려 넌지시 그렇게 제안을 하였다.
"어떤 넉자로 하면 좋겠소?"
가정도 문객들의 제안이 마음에 드는지 금방 반응을 보였다.
"기수강 기슭에서 황제와 현사들이 함께 글을 짓던 기풍을 기린다는
뜻에서 기수유풍이라는 문구는 어떠합니까?"
"기수유풍이라? 이 집이 시냇물을 끼고 있기는 하지만 기수강 같은
강은 끼고 있지 않은데 기수유풍이라면 좀 과장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 집은 황제가 거하실 집이 아니라 후비가 거할 집이기도
하고 말이야"
가정의 지적에 문객들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고 이의를 제기하지는
못하였다.
그외에 풍류의 고장을 뜻하는 저원아적 같은 문구들도 나왔으나
가정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결국 또 보옥에게 넉자 이름을 짓는 숙제가 주어졌다.
"저는 유봉래의가 좋다고 여겨집니다"
유봉래의는 봉황새가 날아드는 형세라는 뜻이었다.
문객들은 그 이름도 좋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으나 가정은 슬며시
머리를 저었다.
"되지도 못한 녀석이 바늘구멍으로 하늘을 보고 하늘을 다 본 양
떠드는구나.
그럼 이번에는 대련을 지어보려무나"
보옥이 집 건물과 뜨락을 돌아보고 나서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시를
읊어나갔다.
차 달이는 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아직도 푸르고 창가에서 두던
바둑 이미 파했어도 손가락 끝은 여전히 시려오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24일자).
한탄하지는 않으리"
가정이 앞뜰과 대나무 숲이 건너다보이는 마루에 앉아 집 대들보며,
기둥이며 방문과 창문들을 연신 둘러보며 감탄의 기색을 거둘 줄 몰랐다.
보옥은 아버지 가정이 달빛이 교교하게 비치는 달밤에 이 집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떠올려보며 그것 참 운치 있는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덧없는 인생 운운한 것이 인상깊었다.
늘 엄격하고 빈틈이 없고 까다롭기로 유명한 아버지인지라 인생의
허무 같은 것은 도저히 느끼지 못하는 사람으로 알았는데, "덧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한탄하지는 않으리(불왕 생일세)"와 같은 멋있는
구절도 읊을 줄 알다니.
"여기 편액에는 넉자 이름을 적어 넣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문객들이 가정의 마음을 헤아려 넌지시 그렇게 제안을 하였다.
"어떤 넉자로 하면 좋겠소?"
가정도 문객들의 제안이 마음에 드는지 금방 반응을 보였다.
"기수강 기슭에서 황제와 현사들이 함께 글을 짓던 기풍을 기린다는
뜻에서 기수유풍이라는 문구는 어떠합니까?"
"기수유풍이라? 이 집이 시냇물을 끼고 있기는 하지만 기수강 같은
강은 끼고 있지 않은데 기수유풍이라면 좀 과장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 집은 황제가 거하실 집이 아니라 후비가 거할 집이기도
하고 말이야"
가정의 지적에 문객들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고 이의를 제기하지는
못하였다.
그외에 풍류의 고장을 뜻하는 저원아적 같은 문구들도 나왔으나
가정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결국 또 보옥에게 넉자 이름을 짓는 숙제가 주어졌다.
"저는 유봉래의가 좋다고 여겨집니다"
유봉래의는 봉황새가 날아드는 형세라는 뜻이었다.
문객들은 그 이름도 좋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으나 가정은 슬며시
머리를 저었다.
"되지도 못한 녀석이 바늘구멍으로 하늘을 보고 하늘을 다 본 양
떠드는구나.
그럼 이번에는 대련을 지어보려무나"
보옥이 집 건물과 뜨락을 돌아보고 나서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시를
읊어나갔다.
차 달이는 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아직도 푸르고 창가에서 두던
바둑 이미 파했어도 손가락 끝은 여전히 시려오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24일자).